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Korean History

남원 춘향제의 기원 (일제시대 감옥소였던 광한루 1-3) 이전글  ->광한루 유교와 도교의 이상세계 (1-2)일제 감옥소 광한루일제 시대에 광한루도 역시 시련이 있었는데 루 위에는 일본 사람들의 재판소로 사용되었고 루 밑에 1910~1918년 18년 동안 독립투사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광한루 기둥 곳곳에 문을 달았던 흔적들을 볼수 있다.    춘향제 기원 광한루는 조선 후기 소설 춘향전의 무대가 된 곳으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곳으로 유명하다. 일제 시대 탄압이 심해질수록 우리 것을 지키려는 남원 사람들의 민족 의식도 강해져서 춘향의 굳은 절개와 정절을 기리는 춘향 사당이 광한루 한편에 세워졌다. 춘향 사당은 1931년도에 세워졌다.  그때 남원 예기 최봉선이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전국을 돌면서 공연을 하고 모금활동을 해서 이 사당을 .. 더보기
황희 정승 이야기 42회 황희는 조선 역사상 최장기 제상에 있었고 87세에 은퇴를 했다. 1363년 고려말 황희는 개경에서 태어났는데 어릴때 부터 영특해서 읽은 건 잊지 않는 총명함으로 남들과 달랐다. 황희가 처음 관직에 오를때는 고려 32대 왕 우왕(재위 1374~1388) 시기였다. 14세~ 30세 황희는 고려 , 조선시대에 공신 혹은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를 채용하던 음서제도에 의해 관직에 14세에 나갔다. 그리고 27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 학관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3년 후 실직하게 된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개국 후 이성계(태조)가 다시 황희를 찾았고 황희의 능력과 인품을 높이 사 직접 조선 관리로 임명한다. 그렇게 황희는 고려 우왕 창왕 공양왕에 이.. 더보기
황희 서달 살인사건 은폐하다. 이전글 서달 살인사건 황희가 좌의정 승진 전 고위 관직자의 아들 서달이라는 선비가 지금의 청주 지역인 신창현을 지나고 있었는데 마을 관아의 아전과 마주치고 아전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아전을 찾아오게 했으나 이미 그 아전은 사라진 뒤였다. 이에 서달은 다른 아전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고 이를 말리던 또 다른 아전을 종을 시켜 때리게 했다. 그런데 그 아전이 매질에 사망한 것이다. 서달은 황희의 사위였다. 이에 황희는 신창현의 관리를 찾아가 사건 합의를 위한 청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서달의 아버지는 형조판서였기 때문에 죽은 아전의 가족에게 뇌물을 주며 합의를 강요한 관리들로 인해 합의서를 제출하게 되고 살인사건은 서달의 종이 저지른 일로 종결되는 듯 했다. 황희 65세에 감옥가다. 그.. 더보기
삼궤구고두례 = 삼배구고두례 진짜 의미는? (삼전도의 굴욕 이유있다) 이전글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을 일으킨 이유 병자호란 발발 8개월 전 병자년 4월 11일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가 된다. 황제 즉위식에서 만주와 몽골에 투항한 명나라 출신 신료들까지 삼궤구고두의 의 예를 갖추었다. 하지만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 두 사람만은 끝까지 절하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홍타이지는 조선 정벌을 결심한다. 조선 사신들이 절을 하지 않은 이유 사실 나덕헌과 이환은 즉위식에 초청된 사람들이 아니였다. 정기적으로 춘신사로 파견되어 오던 사신이었다. 당시 청의 국제적 지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조선의 사신들이었다. 국가 안보를 위해 주변 정세 파악은 필수인데 당시 황제 즉위식의 국제적 의미를 모르고 있던 것이 큰 문제였던 것이다. 조선의 사신들이 절을 하지 않은 이유.. 더보기
조귀인 인조가 가장 아낀 후궁 인조는 44살에 얻은 효명옹주를 애지중지했다. 인조는 효명 옹주를 아낀데는 이유가 있었다. 효명옹주 탄생 1년 전 1636년 병자호란이 있었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심지어 아들 셋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야 했던 인조였다. 27년을 함께 살았던 인열왕후도 전쟁 1년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을 겪고 태어난 효명옹주였다. 이런 효명옹주를 낳은 사람이 조귀인이었다. 조귀인은 효명옹주를 낳기 전까지는 종4품의 숙원이었으나 딸을 낳고 정식 후궁이 된 조귀인이다. 조선 16대 왕 인조의 후궁 조귀인은 인조가 생애에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후궁이다. 조귀인은 누구? 조귀인은 효명옹주를 낳을 당시 일개 후궁이었다. 조귀인의 입궁시기는 1630년으로 인조 즉위 8년째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조는 조귀인을 .. 더보기
김유신은 어떻게 추존왕까지 되었나? 39회 천년가까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도시전체가 박물관이라 불리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묘는 12 지신이 새겨져 있을 만큼 크고 왕릉과 같은 위용을 자랑한다. 신라의 명장이자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김유신은 가야 왕족 혈통이었다. 가야 출신 김유신 신라 진골되다. 가야는 연맹국가로 금관가야 출신으로 42년 김수로왕에 의해 세워진다. 금관가야는 가야연맹의 초기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성장한 나라였다. 금관가야의 10대 왕은 구해왕(김구해: 재위 521~532)으로 김유신의 증조 할아버지였다. 구해왕이 집권하던 6세기경 금관가야는 위기에 빠진다. 가야연맹은 적국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나라로 영토 확장을 위해 신라는 가야연맹을 공격했다. 구해왕은 신라 법흥왕에게 찾아가 항복을 했고 이를 받아들인 법흥왕.. 더보기
갑신정변 (김옥균 능지처참 왜?) 41-2 이전글 갑신정변 이전 상황 (통리기무아문 별기군 설치, 임오군란) 41-1 1884년 8월 베트남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프랑스사이에 청불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 청나라 군대 절반이 빠져나간다는 것이었다. 이에 김옥균은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1884년 10월 17일 조선의 수도 한성 우정총국(=우체국)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우정총국은 조선 26대 왕 고종은 우편 업무를 담당하도록 세운 근대적 기관으로 10월 17일은 우정총국 설립 축하 연회날이었다. 당시 우정국 총책임자 홍영식을 중심으로 김옥균 민영익 등 조선 고위 관료들과 미국, 영국, 청나라등 각국 외교관들이 한데 모인 연회장이었다. 갑신정변 당일 정변을 계획하면서 김옥균은 .. 더보기
갑신정변 이전 상황 (통리기무아문 별기군 설치, 임오군란) 41-1 1894년 새로운 조선을 꿈꾸며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은 상하이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또한 조선으로 돌아온 김옥균의 시신은 돌아온 후 능지처참을 당한다. 운요호 사건 결과 1875년 일본의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침투, 강화도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1876년 일본은 이것을 빌미로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렇게 강화도 조약이 맺어지고 이에 조선은 처음으로 부산, 원산, 인천의 항구를 순차적으로 개항했다. 조약 이후 세계 열강들과도 통상 수교를 맺게 되었다. 서양 열강이 조선의 개항을 요구했던 이유는 일본은 대륙 침략의 목적이 있었고 미국은 동북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거점 확보, 청나라는 조선 식민지화, 러시아는 부동항 확보후 아시아 침략 계획이 있었고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목적.. 더보기
고종 아관파천 이후 상황 (을미사적은 어떻게 되었나? ) 아관파천 배경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을 단행하고 이후 일본을 견제할수 있는 세력 러시아를 얻게 된다. 아관파천이 성공한 것에는 을미사변이 배경이 되고 있다. 명성황후의 시해 사실이 밝혀진 상황이어서 민심은 복수심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을미사변 역사저널 393회 을미사변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한 나라의 국모가 일본인에게 무참히 살해된 사건이다. 1895년 주상전하-> 대군주 폐하, 왕비전하-> 왕후 폐하로 변경 , 1897년 황제의 나라 대한 myvoice.wissue.net 을미사변 직후 김홍집 내각이 실시한 개혁운동인 을미개혁이 시행되었고 단발령이 내려진다. 단발령 강제 시행으로 의병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의병의 확산으로 인해 진압을 위해 관군이 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었.. 더보기
창경궁 경춘전 환경전 /창경원이 된 이유 창덕궁과 창경궁은 숲에 둘러싸여 있다. 숲에 가려져 있어 주거 환경에 적합했다. 창경궁은 성종의 할머니 정희왕후와 어머니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 궁으로 여인들이 살기 좋게 만든 공간이다. 여인들이 있으니 왕은 따라가기 마련이다. 창경궁 경춘전창경궁 경춘전은 궁중 암투의 주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 첫 번째 주인은 성종의 친어머니 소혜왕후였다. 소혜왕후는 인수대비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인수대비가 승하한 건물이 경춘전이다. 그 이후에 약 200년 후 숙종의 비 인현왕후가 기거했다가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약 70년 후 혜경궁 홍 씨의 거처로 사용되며 정조가 태어난 곳 또한 경춘전이다. 이때 사도세자가 용꿈을 꾸었다고 그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 가족에게 그려주는 장면이 영화 사도에 나온다. 장인이 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