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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이완용 어떻게 친미파 -> 매국노 친일파가 되었나?

덕수궁의 일부였던 중명전(밝은 빛이 이어진다는 뜻)은 황실 도서관이었다. 광명이 계속 비추어야 할 이곳에서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1905년 11월 17일 저녁 일본헌병이 덕수궁 중명전에 들이닥친다. 퇴궐준비를 하던 대한제국의 대신들은 겁에 질려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일본 헌병은 대신들을 회의실에 밀어놓고 감금했다. 

 

중명전 외관
중명전 외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포기하는 조약에 찬성하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중명전은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간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이다. 이때 을사늑약에 적극 찬성했던 단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완용이다.  이완용 일본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완용은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였다. 그는 처음에 일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었다.

 

이완용
이완용

이완용 어떻게 친미파가 되었나? 

당시 1886년 설립된 조선 최초의 근대식 공립 학교였던 육영공원을 고종이 세웠고 외교를 통해 미국의 도움을 받아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했다. 그러나 이때 영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들 없었기 때문에 육영공원에서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고 이 육영공원에는 명문가 자제와 현직 관리 중 선발된 30여 명만 입학 가능했다. 이렇게 까다롭고 세심하게 선발된 인재들 중 한 명이 바로 이완용이었다. 

 

육영공원 1886년 설립된 조선 최초의 근대식 공립 학교
육영공원 1886년 설립된 조선 최초의 근대식 공립 학교


1886년 이완용이 29살이 되던 해 이완용은 육영공원에 자원 입학한다. 고종의 의중을 빠르게 눈치채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육영공원에서 열심히 공부한다.  그리고 입학 10개월만에 미국에 직접갈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완용의 미국행 
조미수호통상이 체결된 이후 서울 정동에 미국 공사관이 세워지고 마찬가지로 미국에 조선 공사관을 세워야했기 때문에 주미공사관원 중 한 명으로 선발된 것이다.  

 

임시대리공사로 일하게 된 이완용
 1881년 1월 1일 이완용이 31살이 되던 해 이완용은 2달간의 여정 끝에 미국에 도착한다. 그렇게 공사관 일을 하던 중 조선 외교에 대한 청나라의 간섭 조선으로 인해 11개월 만에 주미 전권공사(박정양)에게 귀국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이것은 이완용에게 기회가 되어 약 2년동안 주미 임시대리공사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1890년 10월 이완용은 대리공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다. 

 

미국으로 떠났던 공사관원들
미국으로 떠났던 공사관원들

 

승정원 근무
이후 대미 외교의 1인자이자 친미파의 대표적 인물로 고종의 최측근 기구 승정원에서 일하게 된다.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던 고종에게 이완용은 최고의 인재였다.  이완용은 34살에 무려 종2품까지 승진한다. 보통 조선시대에는 20~30년 걸리는 직책이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터 생가 앞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터 생가 앞
조지워싱턴 생각 앞에서 찍은 이완용 사진
조지워싱턴 생각 앞에서 찍은 이완용 사진

 

 

이완용 아관파천 주도
이렇게 이완용이 잘나가던 1894년 조선땅에서 청일 전쟁이 발발 결국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간섭이 극심해졌다. 이에 타국의 도움으로 일본을 견제하려던 고종과 명성황후였고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일본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그후 고종은 일본과 친일파의 감시 속에 경복궁에 갇히게 된다.  



이완용은 이때 자신과 친분이 돈독한 미국 공사관에 대피해 있었다.  치외법권 지역인 미국 공사관은 이완용에겐 더없이 좋은 도피처였다. 이때 이완용은 고종을 구출하기 위해 30여명의 행동대원을 대리고 경복궁으로 가지만 계획이 발각되어 실패하지만 미국 선교사를 통해 고종과 연락하면서 다음 기회를 노린다. 그리고 1896년 2월 11일 고종 탈출 계획은 성공한다. 고종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킨 것이다 .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러시아와 접점이 없었던 이완용은 정동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외교 커뮤니티 정동 구락부를 통해 정보를 얻었던 것이다. 정동구락부 회원이었던 이완용은 친미,친러의 정동구락부 회원들과 함께 고종을 탈출시켰던 것이다.  출세를 위해 외세의 도움도 개의치 않았다. 아관파천이 성공한 뒤 직책을 무려 3개나 획득한다.    

 
일본은 온 백성이 보는 한글로 글을 싣는 신문에 궁궐을 떠나 외국 열강에 보호를 요청한 국왕을 폐위해야 한다는 내용을 실으며 고종을 압박했고 이 사태를 이완용이 수습하도록 했다. 이에 고종의 명령으로 이완용은 신문사에 엄중히 경고하고 일본 공사에도 조치를 취했던 이완용이었다.  



 
이완용의 횡령
그러나 1898년 학부대신 시절 해외에 빌린 돈의 일부를 빼돌렸고 1896년 외부대신 시절 미국에 5만 달러를 받고 철도 부설권을 넘겼다는 의혹이 있었고 1898년 전북감찰사 근무할 당시 세금 20만 냥을 횡령해 조사를 받게 되고 이로 인해 관직에서 파직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복귀할 기회를 엿보던 이완용이었다.

 

 

1904년 2월 이완용이 정계를 떠난지 3년 후  1904년 한반도를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러시아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종의 선택은 다시 한번 이완용을 불러 미국의 도움을 받기를 원했다. 이때 이완용은 고종의 최측근 직위인 궁내부 특진관=현재 대통령실 보좌관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정계 복귀 3개월 만에 이완용은 해임된다.  이완용을 정치활동을 반대했던 일본 친일파 세력때문이다. 이들은 아관파천을 주도했던 이완용이 친러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종까지 압박해 이완용을 내쫓았던 것이다.  

 

친일파로 돌아선 이완용

러일전쟁의 승리로 대한제국은 완전히 일본 세상이 된다. 이에 고종은 끝까지 미국에 지원을 호소하려했다. 그러나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은 필리핀 점령을 조건으로 한반도 점령을 인정받았던 일본이었다. 모든 힘의 균형이 일본으로 기울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때 고종이 신임하던 신하가 일본에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일본에 등을 돌리면 모든 것이 위험해지는 순간에 이완용은 자신과 함께 미국유학을 했으나 일찍이 친일파로 돌아섰던 이하영을 찾아간다. 그리고 일본 공사관에 연결을 부탁하고 결국 일본 공사의 추천으로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을사늑약의 주동자 이완용
러일 전쟁 종전 2개월 뒤인 1905년 11월 9일 일왕의 특사 이토 히로부미가 경성에 오게 되고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다는 내용을 국제적으로 공표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리고 5일 뒤 1905년 11월 15일 통역관을 대동하고 고종에게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위해 고종을 협박했던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래서 11월17일 일본의 일방적 요구를 해결하고자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를 주도한 인물이 이완용이었고 회의 끝에 내린 결론은 체결은 불가하다였다.

 

반대 소식을 들은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만나러 가지만 아프다는 핑계로 만나지 않았고 이토 히로부미는 하루 안에 조약을 체결하기로 마음 먹었고 주요 대신들이 모여 있던 중명전으로 향했다.  나가려는 대신들을 일본 헌병들이 막아서고 이토는 대신들을 붙잡고 조약 승인을 강조한다. 이완용의 강력한 찬성으로 8명의 대신 중 5명이 찬성하면서 이들을 을사오적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렇게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면서 일본의 반식민지가 된다. 

 

을사늑약 회의에 참석했던 8명의 대신들
을사늑약 회의에 참석했던 8명의 대신들



 
매국노 이완용
을사늑약 후 일본은 제일먼저 조선을 철저히 감시하기 위해 통감부를 설치했다.  1906년 3월 초대 통감이 된 이토히로부미였다.  이 통감부는 조선총독부의 모체가 된다.  매국노 이완용은 불합리한 상황을 이용해 을사늑약 이후 새로운 내각의 총리대신이 되고 광산사무국 총재로 임명되면서 지위와 재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완용은 이토에게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을 일본에 병합시키겠다는 맹세를 이토 히로부미에게 한다. 

 

일본 통감부 모습
일본 통감부 모습



 
고종 폐위 계획
1907년 헤이그 특사를 고종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했으나 회의에 참석조차 못했던 특사들이다. 이를 계기로 이토 히로부미는 크게 분노하면서 고종을 폐위시킬 계획을 세운다.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일본 천황에게 직접 사과하라’ 라는 내용을 이완용을 지켜 하게 된다.  

 
이토히로부미의 사망
1909년 10월 이완용을 충격에 빠트린 사건이 벌어진다. 자신이 충성을 맹세했던 이토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이완용은 이토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완용 테러당하다. 

이후 이완용이 이재명 독립운동가의 칼에 맞아 생사를 오간다는 신문기사가 실린다.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의 어깨 허리 심장, 팔을 찔렀고 치명적 중상을 입은 이완용은 병원으로 실려간다.  이완용은 친일 매국노 관료 중 최고의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최고의 의료진을 제공해 그를 살려낸 것이다.  이완용은 이 사건을 계기로 매국 행위에 더 전념한다. 1910년 6월 새로운 통감이 왔을때 아픈 몸을 이끌고 마중을 나갔던 이완용이다. 

 

이완용의 다양한 매국 행위들. 

1910년 8월 22일 한일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다.  이것을 이완용이 일본측에 찾아가 한일강제 병합조약을 제안했고 이 말도 안되는 조약이 체결된다. 우리는 이 조약을 경술국치 경술년에 당한 나라의 수치라는 뜻으로 경술국치이후 이완용의 매국행위는 다양한 곳에서 이루어진다.  


아이들에게 어릴때부터 일본어를 가르치게 했고 <이순신전> 같은 위인전을 금서로 지정했으며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의 정신까지 말살하려 했던 인물이다.  


 
이완용의 재산 

당시 일본은 매국 인사들의 공로에 따라 작위와 돈을 내렸는데 이완용은 백작 작위와 돈 15만원을 받았다. 당시 15만원=현재 약 30억 원

 

이완용이 사망전까지 살던 집
이완용이 사망전까지 살던 집


사진 속 집은 3,700평의 대저택이다.  1920년 초에는 이완용이 가지고 있던 현금만 약 300만 원=현재 약 600억 원이었고 당시 이완용은 조선 제일의 현금 부자로 불렸다. 부동산까지 포함하면 재산은 더 늘어났다. 여의도 면적 7.7배의 땅을 갖고 있었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민족의 반역자로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다. 이완용은 1926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약 1300명의 조문객이 참여 성대하게 장례식까지 치러진다. 그리고 친일파의 대명사로 이완용은 지금까지도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