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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 292 전투 : 한국전쟁 전 상황 1949년 38선 상황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1년전부터 38선 근처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19491월 ~10월 38선 충돌 통계를 보면 북한군 출연 횟수는 563회, 북한군 병력은 70,625명, 한국군 병력은 46,073명이었다. 또한 사망자는 4천명이 넘었고 한국군도 320명, 부상 800 , 민간인 사상자도 200명 가까이 되었다. 1949년 내내 38선에서 끊이지 않고 전투가 있었던 것이다. 매일 1.5 건의 충돌과 매일 3.7 명이 사망했다. 이렇게 38선에서 대립을 벌이는 동안 중국에서는 3년째 중국 국공내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 1949년 4월 24일 중국 공산당은 장개석의 국민당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미국이 지원한 국민당이 불리해지면 미국.. 더보기
용산 미군 기지 투어 드래곤 힐 호텔 서울 시내 한복판에 미군 기지가 있었다. 용산 기지의 면적은 여의도의 절반 규모로 축구경기장 200개 크기의 기지였다. 그러나 지도에서 확인하면 용산 미군 기지는 표시 되지 않았다. 반환된 용산 기지가 개방되었다. 아래 하얀 건물은 미군이 이곳의 주인이 되기 전 일본군 초소였다. 현재 드레곤 힐 호텔 자리는 일본 조선군 사령관 관저가 있었던 자리에 호텔을 지은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일본군 초소와 돌기둥이 아직 남아있다. 용산기지 안에는 곳곳에 문인석과 동자상들이 남아있다. 이것은 무덤을 지키던 석상들인데 옛날에 조선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는 증거이다. 사우스포스트 용산 미군기지는 메인 포스트와 사우스포스트로 나뉜다. 사우스포스트 벙커 용산 군사시설 중 제일 상징적인 곳으로 일제 시대 일본.. 더보기
부산 제한유엔기념공원 : UN 공원 속 참전국 이야기 유엔기념공원 7월 27일은 UN군 참전의 날로 우리나라에서 지정되어 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어 유엔군의 희생과 봉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1950년 10월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자 그로 인해 UN군 사상자가 늘며 유해 안장할 곳이 필요했고 제한유엔기념공원은 1951년 1월 6.25 전쟁 전사자 매장을 위해 UN군 사령부가 조성한 곳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던 장병들의 유해를 모아 안장하기 시작했다. 세계 유일의 UN군 묘역으로 평화를 위해 생명을 바친 11개국 2327명 유엔군 장병들이 잠들어 있다.     휴전 후 1955년 대한민국 국회는 유엔군에 보답하기 위해 이곳 토지를 UN군에 영구 기증하기로 결정한다.   UN 묘역이 부산에 조성된 이유는 부산국제영화를 하던.. 더보기
휴전회담 쟁점 포로 송환 무엇이 문제였나? 포로 송환 문제 정전 협상의 최대 쟁점은 포로 송환 문제였다. 그 이유는 포로의 숫자에 큰 차이가 있었다. 공산군 측의 유엔군 포로는 약 1만 2천명 정도였고 UN측의 공산군 포로는 약 13만명이었다. 약 10배 차이였다. 그러나 문제는 유엔군이 억류하고 있는 공산군 포로에 북한군과 중국군만 있으면 문제가 없었으나 북한이 남한을 점령한 이례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강제징용을 당한 남한의 국민들이 북한군에 포함되어 있었다. 강제 동원된 남한 국민을 북한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포로 구성의 차이와 숫자의 차이로 인해 무려 1년 반이나 대립한 포로 송환문제가 계속되었다. 자동 송환을 할 것인지? 아니면 자유송환을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자동송환: 국적에 따라 당사국으로 바로 송환 *자유송환: .. 더보기
연천 경순왕릉 : 신라의 마지막 왕은 왜 이곳에 묻혔나? 10세기 후반 978년 신라 56대 임금이자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의 계속된 침공에 경순왕은 신라를 고려에 내어준다. 그리고 경순왕은 개경에서 눈을 감는다. 경순왕의 관은 조상들이 묻힌 경주로 향했다. 그러나 왕실은 왕의 무덤은 수도에서 백리밖에 두지 못한다는 원칙을 내세우며 운구를 멈추게 했다. 고려는 신라 유민들의 봉기를 우려했던 것이다. 결국 경순왕은 결국 고랑포 신라 국경을 눈 앞에서 두고 개경에서 80리 거리 북쪽 언덕에 묻히게 된다. 경주 밖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야산에 버려졌던 경순왕릉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사라진다. 그러다 조선 영조때 1746년 경주 김씨 후손들에 의해 발견되지만 또 다시 잊혀진다. 그러곧 한참 뒤 1970년대 들어서야 총탄 가득한 경순왕.. 더보기
김유신 : 삼국통일 진실은? 계획에 없었다 ?! 천년 신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땅 경상북도 경주이다. 경주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다. 곳곳에 신라 1000년의 역사와 보물이 숨어 있다. 김유신 이야기 경주 송화산 초입 화려한 무덤 하나가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은 왕이 아니라 삼국통일을 완성한 김유신 장군이다. 1970년 남북이 분단되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 대통령 박정희는 북쪽을 바라보는 김유신 장군의 동상을 경주 황성공원에 세웠다. 김유신은 그 예전부터 위대한 사람으로 칭송되었고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김유신에 대한 이야기가 열전으로 3권이 있다. 그러나 김유신은 경주 사람(경주 김씨)이 아니다. 신라가 멸망시킨 가야의 후손 김해 김씨이다. 또한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적이 없다. 진천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김유신은 부모님이 거처를.. 더보기
허준 무덤 이곳에? : 허가바위에서 동의보감 신형장부도 집필까지.. 허준 무덤 임진왜란때 선조는 수도를 버리고 도망간다. 이때 모두 86명이 따라갔는데 내시가 24명, 마구간 지기 6명, 의관이 2명, 별좌와 사알(심부름꾼)이 2명이였다는 기록이다. 이때 의관 2명중 한 사람이 허준이었다. 그는 선조를 수행했던 왕실 주치의였다. 이곳에는 세 개의 묘가 있다. 부인 안동 김씨, 허준 어머니 , 허준이렇게 세 사람의 묘로 추정된다. 1991년 9월 30일 재미 고문서 연구가 이양재씨가 양천 허씨 족보를 바탕으로 하포리를 뒤져서 허준과 관련된 비석조각을 발견한 것이다. 전남 진주박물관에 있는 태평회맹도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잘 수행했던 사람들에게 호성공신이라는 훈장을 하사하 임금이 선물한 그림이다. 호성공신 양평군 허준이라고 적혀있다. 허준은 죽어서 양평군이라는 직위를 받게 .. 더보기
고랑포, 호로고루 이곳 어디? 고랑포 임진강에서 가장 폭이 좁고 얕은 고랑포는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이 고랑포에서 결정될 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2002년 남북평화협력사업의 일환으로 북한에서 제작해 한국에서 전시된 실물 크기의 광개토대왕릉비를 고구려 유적지 고랑포에 세웠다. 호로고루 임진강 남쪽 절벽에 고구려의 흔적이 남아있다. 호로고루가 있는 이곳은 옛날 1500년전 삼국시대에 치열한 전쟁터였다. 신라, 고구려 백제가 전쟁을 벌였던 곳이다. 호로고루 요새를 차지하기 위해 삼국은 피비린대 나는 전쟁을 벌었다. 보리밭 언덕 넘어 흐르는 강이 임진강인데 그 임진강을 옛날 사람들은 '호로하' 라고 불렀고 그 언덕 위에 있던 요새를 호로고루라고 부른다. 5세기 장수왕 시대 고랑포를 건넌 고구려 군이 세운 성채이지만 높지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