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토정비결 운세 보기 : 희망을 주고자 만든 역술서 우리나라의 독특한 문화 중 하나는 매년 새해가 되면 한 해의 운세를 미리 보는 것이다. 그럴 때 주로 보는 책이 바로 토정비결이다. 이 책을 만든 사람은 조선 시대의 학자 토정 이지함인데, 그는 왜 이 책을 만들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만들었을까? 어려운 이야기는 모두 빼고 아주 쉽게 설명해 보겠다. ▼토정비결 보기 사이트 이동 click ▼ 토정 이지함 누구인가? 이지함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 경제 전문가였다. 그의 본명은 이지함(李之菡)이고, 호는 **토정(土亭)**이었다. "토정"이라는 호는 그가 젊은 시절 흙으로 만든 초가집에서 학문에 몰두한 데서 유래했다. 그는 **중종(재위: 1506-1544)**과 **명종(재위: 1545-1567)**의 시기 동안 살았다. 당시 조선은 사회적.. 더보기 군산 박대 생선이 유명한 이유 군산은 금강과 서해가 만나는 지리적 요충지로, 풍부한 수산물이 오랜 세월 지역 경제를 떠받쳐 왔습니다. 특히 군산 앞바다는 얕고 비옥한 해저 지형 덕분에 다양한 어종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잡히는 박대는 담백한 맛과 부드러운 식감으로 군산을 대표하는 특산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각종 개발과 공사로 인해 바다의 지형이 변화하면서 어획량이 줄어드는 현실도 마주하고 있습니다. 군산 바다와 박대 역사적 관계 박대는 한자로 "방어류에 속하는 물고기" 또는 **"작고 넓적한 물고기"**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박대의 외형과 서식지를 나타내며, 얕은 바다에서 납작한 몸으로 헤엄치는 특징과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군산은 금강 하구와 서해가 만나는 해역에 위치해 있어, 유난히 영양분이 풍부한 어장을.. 더보기 군산에 중국집이 많은 이유: 만보산 사건과 화교의 역사 "왜 군산에는 중국집이 유독 많을까?"라는 질문은 군산을 방문한 이들에게 자주 떠오르는 의문 중 하나입니다. 그 답은 단순히 음식 문화가 발달해서가 아니라, 깊은 역사적 배경을 품고 있습니다. 바로 1931년 발생한 만보산 사건과 그 여파로 인해 군산이 화교들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던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지금부터 이 역사적 배경과 군산에 중국집이 많은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만보산 사건이란 무엇인가? 1931년, 중국 만보산(완바오산) 지역에서 발생한 한인 농민과 중국 농민 간의 갈등이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일제강점기 하에 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 농민들은 중국 땅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었는데, 농업 용수 사용 문제로 현지 중국 농민과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 .. 더보기 소갈비 비싼 이유있다. !! 가든 식당은 신흥 부자의 트랜드.. 소갈비는 한국인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고급 음식이다. 맛과 부드러움으로 많은 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지만, 비싼 가격 때문에 여전히 특별한 날에만 먹는 음식으로 여겨진다. 오늘은 소갈비의 역사와 왜 여전히 비싼 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그리고 강남 개발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조선시대 소갈비 기원 : 맛있는 이유 갈비는 조선시대에 '가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시의전서]라는 조리서에 처음 등장했다. 당시 소는 농업과 운송을 위한 귀중한 노동력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고기로 사용되는 일이 드물었다. 대부분의 소고기 부위는 일하면서 발달된 근육으로 인해 질겼지만, 갈비는 움직임이 적은 부위여서 지방이 적당히 분포되어 부드러운 맛을 자랑했다. 이런 특성 덕분에 조선시대에도 갈비는 귀한.. 더보기 분서갱유 : 법가 VS 유가의 대립 진시황의 선택은? 역사 속에서 "책을 태우고 사람을 죽인다"는 일은 종종 강력한 권력을 가진 통치자들이 사상과 생각을 통제하려고 할 때 일어난다. 분서갱유는 그 대표적인 예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 시행한 강력한 억압 정책이다. 하지만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순히 책 몇 권을 태운 일이 아니라 진시황이 왜 유학(유교) 사상을 그렇게 적대시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 진시황 출생 비밀 먼저 알아보기 여불위,자초와 제태후, 노애 그리고 진시황 출생 비밀 이야기기원전 3세기는 중국 대륙은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었다. 주나라의 봉건제도가 무너지면서 갈기갈기 찢어진 세력들이 7개의 나라로 분리되어 앞다투어 패권경쟁에 뛰어들었고 기원전 247년 진나jangane.tistory.com 법가 VS 유가 유가는 중국의.. 더보기 한국인 삼시세끼 쌀밥 언제부터 먹었나? 쌀밥은 이제 한국인의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식이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흔한 음식은 아니었다. 삼국시대에는 떡과 죽이 주식이었고, 고려시대에 들어서야 밥을 짓는 문화가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1970년대 통일벼가 개발되면서 쌀밥은 대중화되어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모습이 되었다. 한국인의 식탁에 얽힌 쌀밥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자. 삼국시대, 떡과 죽이 주식이었던 시절 삼국시대에는 쌀밥을 먹는 문화가 거의 없었다. 당시에는 무쇠를 주로 무기 제작에 사용해 무쇠솥을 만들 자원이 부족했다. 대신 쌀을 찌거나 갈아 떡과 죽으로 만들어 먹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쌀은 귀한 재료로 상류층과 특별한 행사에서만 사용되었다. 고려 중기, 무쇠솥과 쌀밥 문화의 시작 고려 중기부터 무쇠솥이 등장하며 밥을 짓.. 더보기 녹색혁명 통일벼 사라진 진짜 이유 "식량 자급자족을 달성하겠다!" 1970년대 초, 대한민국은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당시 우리나라는 매년 200만 톤 이상의 쌀을 수입하고 있었고, 국민 한 사람당 연간 쌀 소비량은 130kg에 달했다. 식량 자급은 국가의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통일벼'였다. 1971년 첫 재배를 시작으로, 통일벼는 한국의 녹색혁명을 이끌었고 1977년 마침내 쌀 자급을 달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하지만 모든 혁신이 그렇듯, 통일벼 역시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오늘은 이 혁신적인 벼 품종이 가져온 예상치 못한 문제점들을 살펴보려 한다. 그 전에 통일벼 재배 이유 역사를 먼저 확인하세요 ▶통일벼란 무엇인가? 혁신적이었던 통일벼, 하지만...통일벼는 1970년대 한국의 심각.. 더보기 충신 김처선의 잔혹한 처형: 연산군 폭정의 극치 내시중에 충신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김처선이 거론된다. 김처선은 세종때 입궐해 연산군까지 모두 7명의 왕을 모신 인물이다. 세종때 들어온 김처선은 유배와 복직을 거듭하게 된다.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면서 극심한 권력 쟁탈전이 시작된다. 문종이 병약해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으로 나뉘는데 이때는 김처선이 수양대군에게 속하게 된다 . 수양대군을 위해 궁중의 소식을 전하는 김처선을 문종은 유배를 보낸다. 수양대군 왕이 되기까지 이야기 262 -1 회세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영화 이정재 배우가 분했던 세조의 역할일 것이다. 그럼 이런 세조의 모습이 역사속 세조의 모습과 일치했을까? 세조의 취미는 사냥이었고 사냥을 잘하는 모습은jangane.tistory.com 유배를 다녀온 김처선은 수양대군보다는 단.. 더보기 이전 1 ··· 19 20 21 22 23 24 25 ··· 9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