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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

1차 세계대전 원인 사라예보 사건 (살수있는 4번의 기회가 있었다.) !

1차 세계대전 발발 이유-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황제 계승서열 1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다.  보스니아 통독과 함께 차량으로 이동중 두 발의 총성이 울려퍼진다.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 암살이었다. 암살자는 열아홉 살 보스니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으로 인해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고 갔다.  제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된 일이다.

 


 

왜 오스트리아 대공 부부는 암살당했나? 

 

14세기만 해도 오스만 제국이 발칸반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오스만제국은 러시아와 1877~1878년에 전쟁을 해서 패배한다.  오스만 제국의 쇠퇴로 발칸의 국가들이 독립을 시도하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1908년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를 돌연 합병해버린다. 오스트리아 대공 부부가 사라예보 방문일은 1914년 6월 28일로 보스니아 사람들에게는 치욕적인 날이다.  중세 세르비아 왕국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날이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경술국치와 비슷한 날이었다. 이에 대공부부의 방문은 보스니아 사람들에게 분노의 날이 되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에 극심한 반감을 품은 보스니아 국적의 세르비아인들이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자인 대공부부를 암살했다. 

 

대공부부 살수 있는 4번째 기회

 

첫번째 기회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대공 부부는 보스니아의 사라예보 기차역에 등장한다. 그러나 대공부부는 죽지않을 기회가 4번이나 있었다. 첫번째는 암살계획이 누설되었다. 세르비아가 대공 부부의 보스니아 방문을 재고하도록 슬쩍 권고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무시하고 사라예보 방문을 강행했다. 

 

두번째 기회
암살계획을 알았다면 암살대비한 엄중한 경호는 필수였을 것이다. 사라예보 내에는 오스트리아군 2만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얼마든지 경호를 할수 있었으나 경호인력 120명이면 충분하다고 판단 경비를 허술하게 했다.  오스트리아 대공 경호 목적으로 리무진 6대가 동원되었다. 그러나 대공부부의 차는 오프카였다.  그렇게 두번째 기회가 날아갔다. 

 

세번째 기회
오픈카는 강을 따라 갔고 대공의 동선에 따라 보스니아 암살자들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첫번째 암살자는 대공부부의 부인을 보자 쏠수 없었다고 했고 두 번째 암살자가 폭탄을 던졌으나 폭탄은 대공 부부의 바로 뒤차에서 폭발해 수십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래서 차량은 빠르게 이동해 시청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암살 시도에도 일정대로 행사를 강행했던 것이다. 

 

네번째 기회
시청 행사 후 대공을 주변 사람들이 만류했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남은 일정을 취소하는 대신 부상자들이 있는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그래서 박물관 방문 일정을 취소하고 병원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러나 변경된 일정을 전달받지 못한 운전자로 인해 예정대로 대공부부는 박물관으로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암살자는 누구? 

암살자는 실패라고 생각하고 근처 노상 카페에 앉아있던 프린치프(암살자)는 대공부부의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바로 총을 꺼내 두발을 발사했고 한 발은 대공 부부의 복부에 한 발은 대공의 목에 맞게되면서 거사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암살자 기브릴로 프린치프



암살범은 보스니아 청년이었다.  세르비아가 선전포고를 한 이유는 보스니아 국적의 세르비아인이었다. 당시 보스니아 민족 구성은 세르비아인 약 40%, 보스니아인 약 30%, 크로아티아인 약 20%였다.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은 세르비아에 동조하는 상황이었고  오스트리아 생각은 암살의 배후에 세르비아가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증언이 나왔다.

 

 

흑수단 실체

이 암살자들은 '흑수단' 으로 세르비아 육군 장교들이 결성한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흑수단의 목표는 보스니아를 해방시켜 세르비아로 병합하는 것이었다.  흑수단의 실질적 수장은 드미트리 예비치는 세르비아의 육군 군사정보부장이었다.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개인이 아닌 세르비아 군부가 관련된 사건으로 인식, 당시 세르비아수상 니콜라 파시치는 정부 차원에서 유감의 뜻을 공표했으나 정부 발표와는 다르게 세르비아의 분위기는 암살 사건에 쾌재를 부르며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언론과 관료들은 경사가 난것 같은 분위기 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수상의 공식적인 발표는 의미가 없었다. 

 

오스트리아의 의도
사실 오스트리아는 암살 사건이 없었어도 세르비아를 점령하려고 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다민족 국가로 언제나 민족의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나라였다. 그 중에 가장 열심히 독립운동을 했던 민족이 세르비아인이었다. 그래서 암살 사건을 계기로 세르비아를 확실히 제압하려 했던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보스니아의 정식 명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고 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인, 동방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르비아라는 말은 슬라브 민족이라는 뜻이다.  러시아와 세르비아는 동방 정교회로 종교가 같아 더 친밀하다. 그래서 세르비아 뒤에는 러시아가 있다는 종교적인 영향이 있다. 

 

오스트리아 대공부부가 타던 오픈카

 

 

최후통첩

 

사라예보 사건으로 전쟁 분위기는 고조되었고 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한다.  가장 중요한 최후통첩 6번 조항이었다. 독일어로 작성된 최후통첩문은 오스트리아의 공식언어가 독일어였다.  선전포고 5일전 7월 23일 오후 6시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48시간 이내 답변할 것을 요구했다.

 

6번 조항 내용

 

10개의 요구 중 6번 조항은 수용이 불가능했다.  암살 사건과 관련된 모든 관련자의 사법절차에 오스트리아 정부의 대리인이 참여토록 요구했으나  세르비아 헌법, 주권에 반하는 요구였고 이것반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입장은 하나라도 거절하면 타협은 결렬이었다. 전쟁을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 발발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 이후 한달 뒤 7월 28일 선전포고 당일 세계 1차 대전은 시작되었다. 7월 30일 러시아 총동원령이 내려졌고 같은날 독일도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이에 러시아의 동맹국 영국&프랑스가 참전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사라예보 사건이 왜 세계전쟁이 되었나?
1914년 6월 28일~7월 28일의 한달 간의 유럽의 외교적 긴장상태, 국제 정세가 1차 대전의 주요 원인이었는데 만약 사라예보 사건 직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공격했다면 국지전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한달갈 치열한 외교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는 전쟁을 원하지만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황제가 독일의 빌헬름 2세 황제에게 친서를 전달하고 독일 황제가 오스트리아에 백지수표를 줬다고 말한다. 당시 독일의 입장에서 유일한 동맹국은 오스트리아였기 때문에 전폭적 지원을 약속했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장기전 
1차 대전이 시작되자 유럽의 젊은이들은 잇따라 참전을 했고 마치 소풍가는 듯한 독일군 병사들은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전쟁 발발 직후 2달간 영국의 참전 지원자는 무려 76만 명이었다.  20세기 초 전쟁이 현실을 바꿔줄 거라는 환상이 지배했던 시기로 재앙과도 같은 최초의 세계대전이 장기전이 될거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19세기 말~20세기 제국주의, 민족주의로 인한 갈등이 심화되었고 유럽 사회에서 사회주의가 확산되어 노동운동과 대규모 파업이 발생하던 상황으로 사회적 불안이 극심했던 당시 유럽이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은 몰락했고 유럽의 경제 지배권 상실로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잡게 된 미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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