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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

병마용갱 진시황릉의 친위군단

병마용갱이란 

 

진시황릉에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황제 진시황의 무덤을 지키는 8000명의 진흙 군사 친위군단이 있다. 토용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실제 사람 크기로 저마다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  흙으로 형상을 빚어 구워 만든 모형으로 테라코타라고 부른다.

 

진시황릉의 부장품은 마차, 갑옷, 동물 서커스단까지 있다.
실제 사람크기의 병마용들
모두 다른 모습

 

병마용갱 위치

진시황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지만 병마용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병마용이 발견된 곳은 진시황릉에서 1.5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어서 광화문 유물이 서울역에서 발견된 격으로 처음에는 진시황릉와 연관짓기 못했다.  조사결과 진시황과 관련된 글짜가 나오면서 진시황릉의 병마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시황릉의 면적은 여의도 면적의 13배크기다. 

 

병마용갱 위치


고대는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서 만든 무덤의 봉분은 없었기 때문에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춘추시대 말부터 무덤의 봉분이 생겼고 봉분의 크기가 묘 주인의 지위를 상징했기에 점점 봉분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전국시대부터는 왕의 무덤을 '릉'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진나라때 가서는 황제의 무덤을 산이라고 불렀다. 

 

 

발굴 기간
그래서 황제의 무덤은 즉위하고 바로 황릉 건설을 시작해 죽는 순간까지 건설한다. 진시황릉 건설시간은 왕릉 공사26년 + 진시왕이 황제로 즉위 후 황릉 공사 9년+ 진시황 사후 아들이 마무리 공사 3년까지 총 38년 동안 진시황릉이 만들어졌다. 

 

병마용 모습

병마용은 발굴 당시 색이 살아있었다. 그러나 발굴되는 과정에서 색깔이 빠르게 없어진다.  오랜 세 월 묻혀있다가 공기에 노출되자 바로 산화되어 신기루처럼 색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래 손 아래 칼이 있었다. 장군이 칼 위에 손을 올려놓고 위험있게 서있는 모습인데 칼은 도굴을 당했다.

 

 

이 토용은 쇠뇌를 든 노병을 표현한 토용이었다. 수 많은 토용은 모두 무기를 잡고 있었다.  그 중에 발견된 것이 화살촉이 있는데 모두 규격화되어 대량 생산된 무기로 수리, 교체가 쉽고 훈련 시간을 단축할수 있었다. 

 

살이있는 듯한 토용


병사들은 실제 전투대형으로 서 있는 모습이다. 당시 병사들의 모습으로 이것은 창을 들고 보병대가 진열되어 있는 모습이다. 지휘부를 둘러싸고 포진한 보병이었고 보병 옆으로 양옆 전차병과 쇠뇌 병이 선봉대를 지원했고 평원 지형에서 중요한 후위는 본대의 뒤쪽을 엄호하는 역할을 했다. 

 

실제 전투대형으로 배치된 토용들


사방 어느 쪽으로든 대응하기 쉬운 네모꼴 대형인 방진을 유지했다. 당시 전투력의 핵심은 말이었다.  당시 안장을 사용했음이 병마용갱 발굴로 밝혀졌다. 안장의 유무에 따라 전투력의 차이가 많이 났다.


진나라 통일
진나라는 전쟁 시작 후 11년 만에 중국을 통일했다. 기원전 230년 통일 전쟁을 시작한 진나라의 왕 "정" 은 7국가로  나눠져 있던 중국을 11년 만에 통일에 성공한다. 기원전 221년 진왕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제국과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이 탄생한다.

 



진시황의 업적
진시황의 업적으로 도량형의 통일/화폐 통일/도로 건설 등 중앙 집권 시스템을 구축했다. 전국시대 나라마다 달랐던 한자를 표기를 최초로 통일했으며 기존의 봉건제 대신 지방마다 관리 파견했다. 관리를 통해 36개 군을 직접 통치할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진시황 지하궁전 모습
약 274000m2의 봉분 밑 축구장의 2.5배 지하 30m 깊이의  지상 세계를 본떠 만들어진 지하 궁전은 천장에는 천문 도형으로 장식하고 지리 모형과 수은 강이 바닥에 자리한다. 영원의 불을 밝히는 인어의 기름으로 만든 양초가 켜져있고온 우주가 지하 궁전안에 재현되었다. - 이것은 사마천의 <사기>를 토대로 만든 상상도이다.

 



진시황이 먹었다던 불로초
신선이 살고 있다고 전해지던 동쪽의 심신산에 불로초가 있다고 서복이라는 사람이 진시황에게 상소를 올렸고 서복은  우리나라 제주도에도 왔었던 얘기가 있다. 정방폭포 절벽에 서복이 남긴 글씨 '서불과차'  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후대에 쓰여진 것으로 서복이 다녀갔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이 글씨가 진짜라면 진작에 세계 문화유산이 되었을 것이다.  서귀포의 기원도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서복은 제주도에서 영지버섯을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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