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땅 호주에 유럽의 배들이 도착한 것은 17세기 무렵이었다. 호주에 처음 도착했던 유럽국가는 네덜란드였다. 1606년 네덜란드는 뉴기니 섬과 토레스 해협을 항해한 기록이 있다.
1616년에는 네덜란드가 샤크베이를 탐사 후 해안 지도를 만들었지만 이 땅에 정착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끝 사막이 펼쳐졌고 사람이 살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외면받은 땅에 관심을 보인 사람은 영국 사람 제임스 쿡이었다. 제임스 쿡은 영국 영국 해군 장교이자 탐험가로 대항해 시대의 결정을 이끌었던 인물로 태평양을 3번이나 횡단했고 그 과정에서 하와이, 타이티, 뉴질랜드같은 미지의 땅을 발견한 인물이다. 그는 뉴질랜드를 거쳐 1777년 호주땅에 도달했다.
제임스 쿡이 이렇게 먼 호주까지 온 이유가 있었다. 18세기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열강들은 제국주의 경쟁 속에 앞다투어서 새로운 식민지를 찾는데 불이 붙어있던 때였다. 그가 발을 디딘 곳이 바로 훗날 시드니가 되는 지역이었다. 그는 이때 호주의 원주민 애버리지니를 만났다.
이 원주민은 약 6만 5천년 전 동남아시아에서 건너와 호주 전역에 정착했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원주민 중 하나였다. 그들은 불모의 환경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나마 먹을 게 많았던 동쪽 해안에 주로 모여 살았고 자신들 땅을 지키려는 의지가 아주 강했다. 그래서 낯선 백인을 처음 봤을 때 격렬하게 저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항하는 원주민을 보고 영국 사람들은 결국 총을 쐈다. 이후 제임스 쿡은 호주 동부 해안의 특이한 동물 및 지형을 탐사 한 후 1770년 8월 22일 이곳에 영국 국기를 세우고 '뉴 사우스 웨일스'라 명명한 후 식민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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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강대국 사람들은 원주민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아주 미개한 존재로 봤다. 그래서 그들이 보기에는 여기는 빈땅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고 원주민을 무시한 채 국기만 꽂으면 자기 땅으로 된다는 그런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호주는 미지의 땅에서. 영국 식민지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영국은 산업혁명 그리고 지주들이 땅을 차지한 인클로저의 영향으로 당시 영국에서는 많은 농민들이 땅을 잃고 도시로 몰리게 되었다. 그 결과 도시에는 빈민과 또 가난한 노동자가 늘어나고 굶주림과 질병이 퍼져갔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희망이 없으니까 진이라는 술에 빠져서 상당히 사회적 문제가 되고 이런 혼란 속에서 범죄율이 계속 올라갔다.
그런데 여기서 범죄자가 늘어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 영국의 지나치게 까다로운 법 때문이었다. 오만원 어치의 물건을 훔친 사람을 즉시 사형에 처했다. 땔감으로 쓰려고 나무를 맘대로 베면 역시 사형이었다. 당시 형벌은 교화보다는 엄벌로 다른 범죄를 막으려는 목적이 더 커서 법이 상당히 가혹했다. 17세기에는 사형이 가능한 범죄는 50개 정도였으나 18세기 말에는 이것이 220개로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가혹한 법은 블러디 코드, 피의 법이라는 악명이 붙게 되었다.
가벼운 범죄에도 지나치게 무거운 형벌이 내려지자 점점 거센 비판이 제기되었고 범죄자를 수용할 감옥도 부족한 상황이 되었다. 당시 영국은 전쟁과 재정난으로 새로운 감옥을 마련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영국은 죄수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대안으로 죄수들을 아주 먼땅으로 유배를 보내기로 한다. 처음에 죄수들의 유배지로 미국 식민지를 활용했다.
1700년~1775년까지 영국 정부는 5만 2천 명의 죄수를 북아메리카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으로 영국은 미국이라는 식민지를 잃게 되고 더이상 미국에 죄수를 보낼 수 없게 되자 배를 만들어 강이나 바다에 띄워서 가두었다.
당시 리버풀, 템스강, 포츠머스등에 감옥선이 정박해 있었고 19세기 초 약 40척의 감옥선을 영국은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들어나는 죄수를 감당하기 힘들었고 1787년 5월 11척의 배에 나눠 탄 1500여 명의 죄수들이 영국을 떠나 호주로 향하게 된다.
당시 죄수들의 정착지는 호주 시드니의 잭슨항이었다. 이곳은 호주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브리지가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과거 죄수 수송선의 도착지가 현재 호주의 랜드마크로 발전한 것이다.
호주에 도착한 죄수들은 하루에 12시간 이상 노동을 했고 아주 비좁고 비위행적인 공간에서 지내야했다. 또한 소금에 절인 고기스튜나 딱딱한 빵이 주로 제공되는 한정된 식량으로 지냈다. 이런 참혹한 환경 속에서 많은 죄수들이 사망했다.
If prisoners rebelled or attempted to escape, they were put in shackles and confined in solitary cells. The most dreadful punishment was flogging(채찍질).
형량이 끝난 죄수들이나 모범 죄수들에게는 자유민의 자격이 부여되었다. 영국입장에서는 호주를 식민지로 유지하려면 적절한 인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거나 일자리를 제공하는 당근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무려 93% 호주에 정착하게 된다. 그래서 1788~1868년 영국 죄수들의 호주 유배는 80년 동안 이어졌고 그동안 무려 16만 명이 호주로 유배를 갔다. 이렇듯 호주의 첫 개척자는 영국에서 유배된 죄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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