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글] 스탈린식 공포정치의 상징들: 코메콘 , 나토 , 바르샤바 조약기구 창설 배경 177-3
탈스탈린화
흐루쇼프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탈스탈린화를 시행한다. 스탈린의 개라 불리는 동유럽 지도자를 청산했고 평화 공존이라는 새로운 외교 정책을 제안하며 협력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래서 동유럽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어느정도 정치적 자율성을 인정해주는 자세를 취한다.
헝가리 혁명 배경
이렇게 되자 자유와 개방을 원하는 분위기가 동유럽 국가들 사이에 형성되었고 그 중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곳이 헝가리였다. 헝가리는 스탈린의 하수인이였던 마차시가 시행했던 중공업 중심의 산업으로 인해 소비재 산업이 심각하게 무너진 상태였다. 일상생활을 위한 생필품도 구하기 힘들고 심각한 식량 부족을 겪던 상황이었다. 이에 헝가리 국민들은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고 이때 너지 임레가 등장한다.
너지 임레의 개혁정치
너지 임레는 공산당이었으나 국민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개혁을 추진한다. 강제 집단 농장화를 완화하고 소비재 위주 산업을 활성화 시켰서 국민들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면서 헝가리 국민들은 그전보다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있게 된다.
부다페스트의 봄
소련 흐루쇼프가 헝가리 너지 임레 총리의 급진적 개방정책이 맘에 들지 않았고 다시 한번 스탈린의 하수인이였던 마차시를 불러들이게 되고 1956년 10월 23일 헝가리 국민들의 반발과 저항이 일어나게 된다. 부다페스트 시내에 목이 잘린 스탈린 동상이 출현한 것이다.
이것은 1956년 부다페스트의 봄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약 2만 명에서 시작된 시위는 시간이 지나면서 20만 명의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게 되었고 시위대는 스탈린의 동상을 끌어내리고 구멍 뚫린 국기를 흔들기 시작한다. 이제 헝가리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흐루쇼프는 다시 너지 임레를 헝가리 총리로 복귀시킨다.
헝가리 혁명
너지 임레 총리는 시위대를 달래기 위해 헝가리 사람들의 염원인 소련군 철수를 약속하지만 이미 시작된 시위를 잠재우지는 못했고 결국 형가리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때 흐루쇼프는 헝가리 혁명 진압을 위해 군대를 투입한다. 그러나 부다페스트에 진압하려던 소련군은 시위대의 강한 저항에 진입 실패를 하게 되고 결국 소련은 너지와의 협상을 통해 잠정적으로 헝가리에서 소련군 철수에 합의한다.
형가리 혁명 결과
이후 너지 총리는 코메콘. 바르샤바 조약 탈퇴를 선언하니 1965년 11월 4일 철수를 약속했던 소련군이 다시 부다페스트 침공을 시작했다. 탱크 약 1000대와 12만여 명의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이른 새벽부터 무차별 포격을 가했다. 부다페스트는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10월 23일 시위가 시작된 날부터 약 2주간 혁명이 이어졌고 헝가리 전역에서 약 3000여 명의 시민들이 소련군의 총에 의해 사망했다.
너지 임레 총리와 정부 각료들은 소련에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지고 소련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헝가리 국민 약 20만 명이 해외로 망명하게 된다. 이후 10월 23일을 국경일로 정하고 매년 헝가리 혁명을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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