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orld History/벌거벗은 세계사

오키나와 전투 : 중국, 일본, 미국에 배신당하다 . 176-2

 

[이전글] 오키나와 역사 : 류큐 왕국이 오키나와가 되기까지 176-1

 

오키나와를 점령한 일본은 이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승전국으로 강대국으로 승승장구하게 되고 아시아를 넘어 태평양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1941년 진주만을 공격, 이에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며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 미국은 일본의 점령지들을 빼앗으며 일본 본토까지 후퇴시켰다. 

 

6개월만에 태평양 일대를 장악

 

83일간의 오키나와 전투 

미국은 일본 본토 상륙을 위한 장소로 오키나와를 선택한다.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에서 약 500km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  본섬을 직접 공격하거나 봉쇄 가능한 전략적 요충지로 생각했다. 무엇보다 오키나와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위치해서 타이완과 중국 어디로든 진출이 용이한 지리적 가치로 인해 일본은 오키나와를 일본에서 빼앗아올 필요가 있었다. 

 

 

진주만 공습 이유 / 오키나와 전투 (태평양 전쟁의 시작과 끝 53회)

하와이 오아후섬은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곳이다. 태평양 전쟁의 첫 공격지 진주만을 공격한 일본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일본에게 기회가 된다. 일본은 서구 열강의

jangane.tistory.com

 

일본에게 오키나와는 본토 방어를 위한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할거라는 것을 직감했던것 같다. 미군과 연합군의 병력은 군인 54만 명, 항공모함 40여 척이였고 반면 일본은 10만명의 병력이 전부였다. 그래서 가미카제, 집단 자살령등 무모한 방법을 써서라도 미군의 본토 상륙을 늦추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은 부족한 병력 보충을 위해 오키나와에서 대규모 징집을 실행했다. 70대 노인은 물론이고 아이들까지 무차별 징집을 했다. 

 

 

미군의 강력한 전차에 맞설 무기가 없었던 일본군은 철혈근황대를 만들어 오키나와 학도병들에게 폭탄을 지고 자살을 강요했다. 오키나와 소년들의 목숨보다 폭탄을 더 아깝게 생각해 확실히 폭탄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학도병들의 희생을 강요했던 것이다. 남자들 뿐만아니라 여학생들도 일본군의 간호부대로 징집되었다. 아직 학생이었던 이들은 전쟁 참혹함 속에서  죽어가는 군인들을 간호했고 방공호가 폭격을 받으면 옆에서 친구들이 처참하게 죽어 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전세가 기울자 일본은 이들을 전쟁터에 남겨놓고 도주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2개월 만인 1945년 5월 27일 일본군의 본부였던 슈리성마저 장악된다. 오키나와 전투는 오키나와 출신 일본군 약 3만명과 민간인 사망자 약 9만 4천명이 희생을 당했다. 군인보다 민간인이 3배 이상이나 희생을 당하며 1945년 6월 23일 종결된다. 이는 미군 27000명과 일본 본토출신 사망자 44,000명의 합보다도 많은 수치였다. 이후 미국은 전쟁의 빠른 종결을 위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그렇게 1945년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태평양 전쟁의 막을 내렸다.  

 

 

그래서 오키나와는 이후에도 반일 감정이 깊었고 오키나와 출신 연예인들은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는 걸로 알려져있다. 패전 이후 일본 본토는 연합군의 통치를 받게 되지만 지리적인 전략적으로 최후의 방어선으로 오키나와는 따로 분리해서 미국이 독자 지배를 하고자했다. 그래서 이를 위해 오키나와에 미군정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미군정은 오키나와의 자치를 인정해줌으로써 미국의 민주적인 통치 방식을 국제 사회에 과시하려했다. 

 

미군정에 의해 세워진 오키나와 최초의 대학 류큐 대학

 

1951년 일본과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오키나와를 미군정의 통치아래 들어가는 내용을 공고히 했고 미일안보조약으로 오키나와의 군사 기지화 방침을 드러내며 본격적으로 오키나와를 군사거점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시행한다.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건설 

미군 기지 건설을 위해 주민들의 토지를 몰수했고 군사력을 동원해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낸후 불도저로 주민들의 집과 농토를 밀어버렸다. 저항하는 주민들을 수용소에 가둬두었다. 오키나와에 16개의 수용소를 만들어 군용지로 필요한 땅을 손쉽게 몰수했다. 

 

미군 수용소에 격리된 주민들 오우라사키 수용소

 

격리 후 군사시설을 지었고 이들이 풀려난 후에는 자신의 집이 군사시설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해 길거리 생활을 해야했다. 이때 생긴 최초의 군사 기지가 가데나 공군기지였다. 

 

가데나 공군기지

가데나 공군기지로 인해 학교 3곳과 마을 15개가 사라져버렸다. 이것을 시작으로 오키나와 북부에 북부 훈련장, 헬리콥터와 수송기 등을 운용하는 후텐마 해병대 항공기지등이 만들어졌다.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오키나와보다는 일본 본토를 중심으로 미군 기지가 건설되었으나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면서 일본 본토의 미군 기지들은 오키나와로 이전되었다. 

 

유미코짱 사건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확장으로인해 여러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1955년 9월 4일 가데나 공군기지 근처 쓰레기 하치장에서 만 5세 여아의 시신이 발견된다. 유미코를 납치하여 성폭행한 후 복부에서 창자까지 날카로운 칼로 절단되어 잔인하게 살해를 했다. 이 잔인한 행각을 한 이가 미군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범인이 오키나와에서 재판을 받지 않고 미국의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판정이 내려졌으나 범인이 본국으로 송환되면서 사형이 종신형으로 감형 그 이후 22년으로 감형되어 가석방되었다. 

유미코 사건

 

오키나와 반환 

미군의 흉악범죄와 더불어 항공기 추락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에 미군은 사고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 보상을 진행했으나 보상금이 충분하지 않았다. 일본에 보호를 받는 것도 아니고 미군의 보호를 받는 것도 아니게 된 오키나와 시민들은 미군정에 저항하는 투쟁을 한다. 당시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의 통제가 약해지고 또다시 전쟁에 휘말릴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오키나와에서는 일본 복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일본은 1960년대 말이후 전후 복구를 마치고 다시 경제 대국에 오른 상태였다.  이에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의 성장에 힘입어 미래를 도모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으로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입은 미국은 오키나와와 일본 보토의 군사 기지 운용 비용에 큰 부담으로 느꼈고 결국 1972년 5월 15일 27년만에 미국은 일본과의 동맹 강화를 위해 오키나와 반환을 결정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환 주장 

안타깝게도 일본 복귀 후에도 오키나와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의 반환 조건이 일본 내 미군 기지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엔 미군 기지가 오키나와 본섬의 20%를 차지하게 된다. 일본 본토는 오키나와에 희생을 전가한 것이다. 이로 인해 오키나와 경계에 큰 타격이 가해졌다. 대규모 군사 시설로 인해 기업 유치가 어려워졌고 이때문에 오키나와는 일본에거 가장 높은 실업률과 빈곤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오키나와는 여전히 미군 기지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특히 일본 복귀 이후 미군의 성범죄 흉악범죄는 1972년부터 2020년까지 582건, 항공기 추락과 항공기 관련 사고는 826건으로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