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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조선의 폐비 왕비들 몇명? 폐비 윤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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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조선 시대 폐위된 왕비들의 삶을 통해 당시 왕비들이 겪었던 고달픈 삶과 정치적 희생, 그리고 인간적인 갈등을 조명하는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이다. 조선 시대 41명의 왕비 중 무려 11명이 폐위되었으며, 그 배경은 크게 투기, 왕의 폐위, 그리고 정치적 희생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1명

 

1. 투기로 폐위된 비운의 여인: 폐비 윤씨

조선 시대 최고 성군 중 한 명인 성종의 왕비였던 폐비 윤씨의 이야기는 투기가 한 여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 왕비가 되기까지의 과정: 윤씨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검소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정희대비와 인수대비 등 왕실 어른들의 눈에 들었다. 특히 왕비 한씨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윤씨가 성종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간택 후궁인 수기에서 왕비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이는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듯한 순조로운 과정이었다.
  • 비극의 시작: 그러나 윤씨가 왕비가 되자마자 비극이 시작된다. 시어머니 인수대비가 왕실의 번영을 위해 윤씨의 임신 중에 후궁 두 명(숙이 정씨, 엄씨)을 들이면서 갈등의 씨앗이 뿌려진다. 당시 조선 왕실에서는 왕비가 임신하면 부부관계를 금기시했기 때문에, 성종은 새로 들어온 후궁들을 가까이하게 된다. 윤씨는 왕의 사랑과 왕실 어른들의 관심이 다른 후궁들에게 쏠리자 점차 불안과 분노에 휩싸인다.
  • 복수 계획과 악행: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다른 후궁이 아들을 낳아 왕비 자리에서 쫓겨날까 봐 불안했던 윤씨는 결국 복수를 계획한다. 그녀는 몸종 월리를 시켜 친정에서 저주 도구와 독약인 비상을 구해 온다. 비상은 '독의 왕'이라 불리는 비소 화합물로, 주로 음식에 타서 독살하는 데 사용되었다. (조선 시대 사약을 마신 죄인은 약효를 빨리 돌게 하기 위해 뜨거운 방에 들어가야 했고, 심지어 노론의 당수 송시열은 비상이 잘 듣지 않아 세 사발을 마시고도 죽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윤씨는 이 비상과 저주 도구를 이용해 다른 후궁들을 해치려 했다.

 

  • 악행의 발각과 폐위: 어느 날 정희대비에게 익명의 편지와 함께 저주 도구, 비상이 담긴 상자가 전달되면서 윤씨의 악행이 드러난다. 처음에는 엄씨와 정씨가 꾸민 음모라고 여겨졌으나, 조사 결과 윤씨의 소행임이 밝혀진다. 특히 윤씨가 비상을 바른 감과 저주소를 가지고 있다가 남편 성종에게 발각되는 결정적인 증거까지 나온다. 이 모든 것을 몸종 월리에게 뒤집어씌우려 했지만, 이미 왕실 어른들의 신뢰를 잃은 뒤였다.
  • 과격한 언행과 최후: 폐위 위기 속에서도 연산군이 원자로 있었기에 신하들의 반대로 한 차례 폐위가 철회된다. 그러나 윤씨는 성종에게 "그 눈을 빼고, 전화의 발자취까지 없애버릴 겁니다", "왕 같아서는 그 팔을 끊어버렸습니다"와 같은 극단적이고 과격한 언행을 서슴지 않았고,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남기는 일까지 벌인다. 결국 1479년 6월 2일, 성종은 신하들에게 윤씨를 폐서인할 것을 명한다.
  • 씁쓸한 죽음과 후대 평가: 폐위된 윤씨는 친정에 감금되어 철저히 단절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폐위된 지 3년 만인 1482년 8월 16일, 성종에게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다. 훗날 아들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로 추존되며 묘호(회릉)도 격상되지만,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윤씨는 다시 폐비로 원상 복귀된다. 그녀의 묘 '회릉'에는 '그리워할 회(懷)' 또는 '회개할 회(悔)'의 의미가 담겨 어머니에 대한 연산군의 그리움 혹은 후대의 복잡한 심경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왕이 폐위되면서 함께 폐위된 왕비는 단종의 정비 정순왕후, 연산군비 거창군부인 신씨, 광해군비 문성군부인 류씨 세 명이다. 이 중 연산군비 거창군부인 신씨는 폭군 연산군을 남편으로 둔 비운의 여인이었다.

 

 

 

거창군부인 신씨 (연산군비) :왕의 폐위로 인한 동반 폐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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