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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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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등장은 18세기 후반 실학자들 사이에서 서학(西學)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천주교를 학문적·종교적으로 연구하다가 실질적인 신앙으로 받아들였고, 그 중심에는 이승훈, 정약용, 정약종 같은 실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곧 왕실과 조정에서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요소로 간주되었다.

 

▣ 천주교 박해의 배경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는 조선 후기 사회 구조와 종교적 충돌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조선을 이해하려면 유교, 특히 성리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 성리학은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국가 운영의 근간이었다. 조선은 철저히 유교를 기반으로 한 사회였으며, 천주교는 그 가치관과 의식 체계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유교에서는 가족과 조상을 섬기는 "효"와 "제사"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조상 숭배를 우상 숭배로 간주하며 이를 금지했다. 이는 유교적 질서의 중심축을 흔드는 위협으로 여겨졌다.

 

박해의 주요 원인

  1. 유교 질서와의 충돌
    조선 사회는 철저한 유교 중심 체계였다. 조상 제사는 개인의 신앙을 넘어 국가적 의무로 여겨졌는데, 천주교는 이를 부정했다. 조상을 숭배하지 않으면 불효자로 낙인찍혔고, 이는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2. 정치적 불안과 외세의 위협
    19세기에는 서구 열강의 세력이 동아시아로 확장되면서 조선은 외부 위협에 민감해졌다. 천주교는 서양 선교사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이는 조정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는 프랑스 선교사 9명이 처형된 사건으로, 이후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공하는 병인양요로 이어졌다. 조정은 천주교를 반외세의 상징으로 삼으며 탄압을 강화했다.
  3. 사회적 혼란 방지
    천주교는 "신 앞의 평등"을 강조하며 조선의 신분제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노비와 양반이 신앙 안에서 동등해질 수 있다는 점은 기존 계층 질서를 유지하는 데 심각한 위협이었다. 신유박해(1801년)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발발했고, 이는 천주교인들이 몰래 신앙을 지키도록 만들었다.

 

 

천주교 박해의 주요 사건

 

초기 천주교 박해는 18세기 후반으로 1785년, 천주교 집회를 금지하며 본격적인 단속이 시작되었다.

  1. 신해박해 (1791년)
    처음으로 천주교 금지령이 내려진 사건이다. 이승훈이 조상의 제사를 거부하면서 천주교의 사회적 반발이 시작되었다.
  2. 신유박해 (1801년)
    순조 즉위 초기 왕권이 불안정했던 시기, 정약종을 포함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이 사건은 천주교 탄압의 정점으로 여겨진다.
  3. 기해박해 (1839년)
    천주교 박해가 더욱 강화되면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희생되었다.
  4. 병인박해 (1866년)
    조선 역사상 가장 혹독했던 천주교 탄압 시기로, 8천 명 이상의 천주교인이 희생되었다. 이 사건은 서양과의 충돌을 본격화한 병인양요로 이어졌다.

**정약용 형제들과 함께한 조선 천주교 박해 역사(신유박해 황사영 백서사건 책롱사건 등)

 

▣ 유사 사례와 비교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유럽 중세의 종교 개혁과 대조적이면서도 유사점을 가진다.

  • 유사점:
    유럽의 종교 개혁에서 새롭게 등장한 종교(개신교)가 기존 권위(가톨릭)에 도전했듯, 조선에서도 천주교가 기존 유교 체제를 흔들었다.
  • 차이점: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이 교회와 사회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조선은 철저히 천주교를 억압하여 사회의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천주교 박해의 결과와 현대적 의미

  1. 순교자들의 신앙과 유산
    천주교 박해는 순교자들을 낳았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방한하여 103명의 한국 천주교 순교자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이는 천주교가 한국에서 깊은 정체성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2. 신앙의 자유 확보
    1886년 한불조약 이후 천주교는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는 순교자들의 희생을 기리며 9월 20일 한국 순교자 대축일을 기념한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비밀리에 신앙을 이어가며 오늘날 한국의 주요 종교로 자리 잡았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한국 가톨릭의 상징적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결국 천주교 박해는 단순히 종교를 억압한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 사회의 질서를 지키려는 몸부림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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