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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잊혀진 영웅 강우규 의사 : 서울역 앞 동상 그는 무엇을 했나?

강우규 의사는 누구? 

의열투쟁의 대표적 인물로 안중근을 떠올린다. 의거 당시 안중근의 나이는 31세였다. 일왕의 생일축하연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의 당시 나이도 24세였다.  그러나 적지않은 나이 65세의 나이로 의열투쟁을 했던 인물이 있다. 강우규 의사이다. 

 

서울역 앞 동상 강우규 독립운동가

 

 

친일파 양성 사이토 마코토 

1910년 한일합병이후 일순간 나라를 잃은 삼천만 조선민중은 비탄에 잠기게 되고 1919년 3.1운동이 평화적으로 전개되지만 일본은 무자비하게 총칼로 민중을 탄압했다. 이후 일본은 문화통치로 식민정책을 바꾼다. 1920년대 이 문화통치를 통해 수많은 친일파가 양성되었다. 그 시발점을 만든 인물이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었다. 그는 폭력이 아닌 교묘히 민족분열을 조장해 조선 민족을 분열시키려 했던 인물이다. 

 

제 3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조선 민족 운동에 대한 대책> 문화통치 내용

 

강우규 의사 의거 

이에 강우규 열사는 북만주로 망명을 택한 후 만주에서 독립운동 기지 '신흥촌' 을 건설하고 사이토 총독을 처단하기로 마음 먹는다. 이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동맹단' 이 결성(1919년 3월 26일 한인 노인 50여 명이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되고 강의규 의사도 노인동맹단에 가입 후 의거에 돌입한다. 

 

강우규 의사는 러시아에서 폭탄을 구입후 폭탄을 허벅지에 차고 서울로 잠입한다. 그리고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당시 일본 사이토 총독을 제거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으나 총독 환영 인파 중 37명이 부상을 당했 안타깝게도 옷자락만 살짝 타는 정도에 그쳐버렸다. 이 사건은 당시에 워낙 큰 사건이여서 여러 신문에 보도가 되었다. 

 

강의규 의사 의거 내용

강우규 의사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보름 동안 거주지를 이동하며 피신했으나 밀정의 신고로 결국 1919년 9월 17일 체포된다. 

 

강우규 의사의 마지막 순간 

일본 검찰관이 남긴 강우규 의사에 대한 소회는 그렇게 당당한 노인은 처음이었다고 회고 하고 있다. 사형 선고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재판관을 향해 호통을 쳤다고 한다. 

 

사형선고를 받던 날 찍힌 사진
강우규 의사가 순국 직전 남긴 시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 의사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이런 강우규 의사 희생이 젊은이들을 부끄럽게 만들었고  기폭제가 되어 이후 의열단,  한인애국단, 많은 의혈단 운동등이 벌어지게 된다. 

 

강우규 의사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 중

 

▼설민석 버전 

강우규 의사 (3.1 운동 이후 처음 일으킨 항일 의거)

 

강우규 의사 (3.1 운동 이후 처음 일으킨 항일 의거)

친일 경찰 김태석에게 체포 된 유명한 독립운동가 중에는 1919년에 강우규 의사가 있다. 의열 투쟁을 벌인 강우규를 잡기 위해 안달난 친일 경찰 김태석이었다. 3.1운동 후 만세 시위운동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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