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현이 독립운동을 한 계기
남자현은 경상북도 영양에서 지내온 인물로 을미사변 당시 남자현의 남편은 의병 활동을 하던 중 전투 중 사망하게 된다. 그 당시 임신 중이였는데 남편의 마지막 옷을 품고 다녔다고 한다. 남자현은 아들을 다 키우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봉양한 후 남편의 복수를 위해 47세의 나이에 아들과 함께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했고 1919년 만주로 망명 후 독립군 부대 서로군정서에 들어갔고 서로군정서의 신흥무관학교에 아들은 입학을 했다. 이렇게 남자현은 오랜기간 준비를 했고 실제 남자현은 총을 잘 쐇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흥무관학교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와 러시아로 이주하게 되고 그곳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관을 세우게 되는데 대표적인 기관이 신흥무관학교였고 1920년까지 20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무장투쟁의 산실이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무장 독립운동 단체 조직으로 이어져 압록강쪽에는 서로군정서, 두만강 근처에는 북로군정서가 만들어지고 북로군정서의 대표적인 전투가 청산리 전투이다.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훈춘사건,어랑촌 전투)/홍범도,김좌진장군묘 알아보기
남자현은 1920년대 중반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기위해 암살용 폭탄과 총을 가지고 서울에 잠입한다. 남자현 의사는 47세에 만주로 망명했고 거사를 단행할 당시, 50대 초중반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영화의 전지현 배우와는 다소 나이 차이가 있겠다.
남자현 의사의 독립활동
남자현은 1926년 조선혁명자후원회를 결성해서 여성독립운동가가 할수 있는 운동을 했다. 수감자를 지원하고 가족들의 생계를 보장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마지막 사진을 찍을 때 웃는 모습으로 찍었다고 한다.
1930년대 남자현 의사는 만주에서 의열투쟁을 전개한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게 되고 1932년 만주국을 설립 허수아비 왕 만주국 황제 푸이를 앉힌다. 이에 중국은 국제연맹에 일본의 침략행위를 호소하고 국제연맹의 리튼을 중심으로 한 조사단이 파견된다.
이때 우리 독립군도 리튼경에게 혈서를 전달하려 했으나 전달에 실패 후 직접 의거를 준비한다. 1933년 만주국 수립 1주년 때 만주국의 실세 일본 전권대사 부토 노부요시를 암살할 계획 세운다
남자현 의사의 죽음
남자현의 주도로 폭탄과 권총을 준비하게 되지만 밀정의 신고로 거사 직전 체포되게 된다. 체포 된 후 남자현은 마지막 투쟁으로 단식을 하게 되고 죽기 직전 1933년 8월 17일 병보석으로 출감한 남자현은 자신의 아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독립된 조선에 광복되는 그날 자신이 남긴 축하금을 전달해달라고 유언하고 세상을 떠난다.
남자현은 1933년 8월 23일 하얼빈 외국인 묘지에 안치되지만 지금은 그 묘소는 헐리고 남자현 의사의 유해를 찾을 길이 없는 상황이다.
'Korean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잊혀진 영웅 강우규 의사 : 서울역 앞 동상 그는 무엇을 했나? (0) | 2024.08.02 |
---|---|
사후 세계 믿음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1) | 2024.08.01 |
동의회 엄인섭 독립투사에서 밀정으로.. (15만원 탈취 의거 ) (0) | 2024.07.30 |
이름없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동의회, 권업회 만들다. (0) | 2024.07.30 |
한민족 역사 (한민족 기준이란 : 고려인, 조선족, 재일동포는 우리민족인가?) (0) | 2024.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