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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의자왕은 왜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되었나? (9)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이다. 의자왕은 삼천궁녀, 안시성 기벌포, 황산벌 전투 등 영화의 소재가 되었지만 사실 그는 처음부터 방탕하고 무능한 왕은 아니었다. 그는 왜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되었는지 알아본다. 

 

의자왕은 누구? 

 

의자왕 뜻은 옳을 의 , 사랑 자, 로 의롭고 자비로운 왕이라는 뜻이다. 7세기 중반 삼국시대 모습으로 백제가 특히 경계하던 나라는 신라였다. 의자왕은 왕으로 즉위하고 이듬해 632년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섰고 의자왕이 지휘한 첫 전투에서 40여 개의 신라성을 함락시키며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재위하자마자 신라를 벌벌 떨게 했던 의자왕이었다.

  

7세기 중반 삼국시대 모습
7세기 중반 삼국시대 모습



왜 백제는 신라만을 열심히 공격했던 것일까? 

지리적인 이유도 있었으나 백제 의자왕 가문의 복수심 때문이었다. 무려 4대조부터 이어진 원한이었다.  그 시작은 나제 동맹이었다. 433년 신라와 백제의 동맹으로 고구려에 맞서기 위해 맺은 동맹이었다. 당시 5세기 고구려는 한강유역 전반을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고 한강을 통해 교역하며 비옥한 토지까지 확보하고 있던 고구려였다.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는 군사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5세기 7세기 삼국모습 비교
5세기 7세기 삼국모습 비교


나제 동맹 결렬
나제 동맹 120여 년 후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은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을 탈환하게 된다. 그러나 신라가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려 백제를 배신하면서 120여 년간의 동맹은 깨지고 백제와 신라는 둘도 없는 원수가 된다.

 

 

신라와 백제가 원수가 된 이유

백제는 동맹을 깨고 신의를 저버린 신라의 복수를 다짐한다. 분노를 참지 못한 백제는 신라로 진격하게 되고 백제군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출전한 성왕이 충북 관산성에서 매복해 있던 신라군에게 잡혀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하며 전사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백제 성황의 머리를 신라 궁궐 계단 아래 묻었다. 이로써 신라는 백제의 철천지 원수가 된다.  이것을 잊지 않고 있던 의자왕은 즉위하자마자 신라의 40여 개 성을 공격하면서 신라에 복수를 한 것이다.

 

26~31대 백제 왕위
26~31대 백제 왕위

 

의자왕이 늦은 나이에 왕이 된 이유

 

의자왕은 백제 무왕의 적장자였다. 군사적 재능과 왕위 적통성까지 지녔던 의자왕이었으나 왕에 즉위하기까지는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의자왕이다.  의자왕은 태자(군주 지위 계승이 예정된 아들)가 되기까지 33년이 걸렸다.  보통 왕의 즉위 후 3~4년 내 태자 책봉이 이루어지는데 의자왕은 늦은 나이에 태자 책봉이 이루어진 것이다.  

 

무왕의 아들 의자왕
무왕의 아들 의자왕



의자왕 출생의 비밀
이유는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이 서동요의 주인공으로 마 캐는 백제 소년 서동(무왕)이 신라 왕 셋째 딸이 이쁘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로 건너가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면서 거짓으로 선화공주와의 염문설을 퍼뜨린 서동이었고 이 이야기는 신라 왕실까지 들어가게 된다. 이에 신라왕은 선화공주는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고 결국 서동과 결혼하게 된다.  그 후에 서동은 백제의 30대 왕이 되고 의자왕이 탄생했다는 것으로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의자왕은 신라 출신 왕비 소생이기 때문에 왕자의 입지가 약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탁왕후와 경쟁
또한 의자왕에게는 왕위를 두고 사탁왕후와 경쟁을 해야 했다. 의자왕이 장성한 뒤 무왕이 새로 맞은 아내가 사탁왕후로 그녀에게 아들이 있었다. 계모인 사탕 왕후가 자신의 아들을 왕자의 올리려 의자 왕자의 태자 책봉을 막았다고 추측된다. 

 

 의자왕과 사탁왕후의 관계를 미륵사지 석탑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국보 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유물 '사리 봉안기' 기록에는 남편의 만수 무광을 비는 글이 적혀있는데 정작 아들 의자왕에 대한 내용은 없다. 다른 사례와 비교해 보면 이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다. 이에 의자왕은 살아남기 위해 효를 충실히 행하며 행실을 바르게 하면서 지냈던 것은 일종의 생존 전략이었을 수도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 내용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 내용

 

대야성 전투
그리고 태자 책봉 후 9년 뒤 무왕 42년 641년 40대 중반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즉위 후 1년  4개월 만에 신라 40여 개 성을 빼앗는 성과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의자왕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려 했고 신라 장수 검일의 도움으로 백제는 손쉽게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대야성 위치
대야성 공격

 

신라 장수 검일이 백제를 도운 이유는 신라 대야성 성주 김품석이 그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일은 대야성의 식량 창고를 알려주었고 이를 불태우면서 백제는 승리하게 된다.  

 

신라 김춘추 복수 다짐
그리고 의자왕은 성주 김품석과 아내를 처형해서 그들의 유골을 감옥 아래 묻고 죄인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  김품석의 아내가 김춘추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라에 복수했다며 기뻐한 의자왕이었다.  가족의 죽음에 김춘추는 복수를 다짐한다.

 

안시성 전투

그러나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는 백제를 공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외교를 통해 힘을 빌리기로 했다.  이에 김춘추는 고구려로 가서 642년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도착한다.  고구려와 평화협정을 맺으려 했으나 한강유역을 요구하는 고구려였기에 협정은 실패했다. 이에 다시 당나라로 간다. 이렇게 648년 나당 연합이 체결된다. 당시 백제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당나라가 신라와 동맹을 맺은 것은 고구려 때문이었다. 645년 영토 확장을 위해 고구려를 침략했던 당나라였다. 이것이 바로 안시성 전투이다.  안시성 전투는 고구려의 승리로 끝난다.

 

십자동맹 구도


이렇게 의자왕 시대는 백제-고구려 vs 신라-당나라의 십자 동맹 구도가 형성이 된다. 

 

의자왕의 변화

의자왕은 자신이 목표했던 복수를 하고 난 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즉위 15년 백제 내부에서 의자왕을 가장 견제했던 그룹인 사탁왕후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평생의 숙적이 사라지면서 사탁왕후의 가족과 측근 세력까지 모두 추방해 버렸다.  그 후 그는 주색에  빠져 정사를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의자왕을 대신에 의자왕의 비 은고가 백제의 실권을 장악한다.  의자왕은 은고의 말에 좌지우지되었고 심지어 태자였던 융을 갑자기 폐위한 후 은고의 아들을 태자로 올려버렸다. 게다가 은고의 아들 효의 궁을 화려하게 수리해서 백성의 원성을 듣기 시작한다. 

 

 

기벌포 전투
660년 나-당 연합군은  백제를 공격한다. 김춘추가 나당 연합을 맺은 지 12년 만의 일이다. 18만 나당 연합군이 백제 수도 사비성의 인구가 6만이 안되던 시절이었는데 3배의 규모를 몰고 온 것이다.  당나라는 바다를 건너 백제 기벌포로 가고 있었고 신라는 육로를 통해 탄현으로 가고 있었다.  당나라-신라는 양쪽 방향으로 공격한 뒤에 백제의 수도 사비에서 함께 공격했다.

 

 기벌포 전투 당, 신라 공격루트
기벌포 전투 당, 신라 공격루트


황산벌 전투과 의자왕의 최후

 

이때 백제의 마지막 방어선이 황산벌이었다.  황산은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일대를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서 최후의 혈전을 벌였으나 백제는 수적 열세로 패하고 만다.   의자왕은 이후 수도를 버리고 도망갔다가 항복 선언을 한다.  그리고 660년 9월 의자왕은 당나라 수도로 끌려가고 의자왕이 끌려가는 모습을 백성들은 산 정상에서 배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그리고 의자왕은 60대 후반  당나라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황산벌 지금의 충남 논산 벌판으로 추정
황산벌 지금의 충남 논산 벌판으로 추정
부여 유왕산에서 의자왕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백성들
부여 유왕산에서 의자왕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백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