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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벌거벗은 세계사

오펜하이머 : 원자폭탄의 아버지는 스파이였다!?

전세계 핵보유국은 총 9개국뿐이다. 그러나 2022년 이들 나라가 보유한 핵무기의 보유량은 무려 약 12705기가 되었다. 이모든 것의 시작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주역이자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은 천재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이다. 유일무이한 원자폭탄의 아버지 ,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비상한 아이디어로 문제를 해결한 뛰어난 리더였고 과학계에서 인정한 천재로 당시 최신 이론들도 모두 꿰뚫고 있을 만큼 똑똑했다. 미국 영국 독일등 세계를 누비며 물리학의 지평을 넓힌 사람으로 오늘날 평가받고 있다. 

 

2022년 1월 기준 전 세계 핵탄두 예상 보유량

 

오펜하이머는 3년 만에 세상에 없던 신무기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다. 핵무기 개발 성공 후 미국은 그를 영웅으로 추앙했지만 정작 오펜하이머 자신은 죽음의 신, 세상의 파괴자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1950년대 오펜하이머를 둘러싸고 예상치 못한 의문들이 제기된다. 

 

 

오펜하이머 어린시절

오펜하이머는  1904년 4월 22일 미국 맨해튼에서 2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일 출신 유대인 아버지 밑에서 부유하게 자랐으나 허약 체질로 자주 아팠다. 세균에 감염될 것을 염려한 어머니가 아이들과 접속을 하지 못하도록 했기에 어머니의 과보호 속에서 자연스레 서재 속 많은 책들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천재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9살 무렵 이미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익혔고 훗날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까지 완벽하게 마스터한다. 이렇게 오펜하이머가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데는 몇 달정도면 충분했다. 언어만이 아니라 과학에 푹 빠져 8살때부터 실험을 즐겼고 10살 무렵에는 물리학과 화학 개념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초, 중, 고 만년 모범생이었고 1921년 17살의 나이에 고등학교 수석으로 조기졸업을 했다. 1922년 18살에 그가 선택한 대학은 하버드대학교 화학과에였다.  그는  대학입학 후 화학이 아닌 물리학에 더 관심이 갔고 전공 화학 수업과 물리학까지 청강하며 3년만에 하버드대도 조기 졸업한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오펜하이머는 물리학을 심도 깊게 배우기 위해 물리학의 성지라고 물리던 영국 케임브리지대 대학원에 입학한다. 

 

 

이때 케임브리지대학을 방문했던 독일의 이론 물리학자 막스 보른 교수(양자역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 1954년 양자 역학 심층 연구로 노벨물리학상 수상을 받았다.)가 오펜하이머에게 독일에서 공동연구를 먼저 제안하게 되고 이를 받아들인 오펜하이머는 독일 괴텡겐 대학교로 편입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유명 학자들과 교류하며 지식을 얻게 되고 특히 양자 역학에 흥미를 느꼈다. 당시 양자역학은 독일을 중심으로 태동하던 신학문이었다. 빠르게 양자역학에 대한 학문을 익히기 시작한 그는 1년 동안 무려 17편이상의 논문을 쓴다. 이후 25세에 UC 버클리대학,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두 대학에 동시에 교수로 임명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열정을 쏟고 있었다.

 

핵폭탄 개발 계기

그 무렵 독일의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유럽 정복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며 전운이 감돌게 된다. 게다가 독일의 결속을 위해 유대인 탄압 정챙을 시행하니 독일의 유명한 과학자들은 망명을 떠나게 된다. 이들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핵분열 발견 

그를 따라 여러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나치의 횡포가 심해지던 1938년 독일 과학계에서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물리학자들을 긴장시킨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핵분열의 성공이었다. 독일의 과학자들이 실험을 통해 특정 핵의 분열과 함꼐 굉장한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것도 알게 된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자폭탄의 원료인 우라늄 핵이었다. 

 

 

핵 하나 분열될 때 에너지가 석유가 탈때의 200만 배 이상 발생하고 더 놀라운 것은 우라늄 핵이 분열할때 중성자 2-3개가 발생하기 때문에 연쇄 반응으로 수없이 핵이 분열하는 것이고 이때 나온 에너지를 이용해 무기를 만들면 엄청난 파괴력의 무기인 원자폭탄 개발이 가능해지는 것이었다. 

1939년 4월 독일은 원자폭탄 개발을 위해 비밀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고 이 프로젝트의 총괄은 천재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가 이끄는 나치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였다.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과학자들은 히틀러가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면 세계를 점령할 것을 우려해 1939년 8월 아인슈타인의 서명편지가 담긴 편지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보내게 된다. 

 

 

 

독일의 핵 원료 확보 

이렇게 편지를 전달 한달 후 1939년 9월 1일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 중 나치는 원자폭탄 자원을 확보하게 된다. 독일이 합병했던 오스트리아에는 고품질 우라늄 생산지 요아힘슈탈 광산을 확보, 1940년 벨기에를 지배하게 되면서 벨기에 식민지였던 콩고의 세계 최대 우라늄 광산 신콜로브웨 광산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즉시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는 다량의 우라늄을 확보했던 것이다.

 

이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나라는 영국이었고 1940년 4월 영국은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개발 전에 영국은 런던 대공습(1940~1941)으로 인해  포기하고 만다. 런던에 밤낮없이 가해진 폭격으로 인해 런던은 마비가 되었고 이에 처칠은 자신들이 개발하던 핵무기 관련 나치의 행보와 함께 영국의 개발 보고서를 미국에 전달하게 된다. 

이로 인해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1년 10월 9일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프로그램을 승인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개발 회의에 참석해  폭탄에 필요한 우라늄양을 계산, 핵개발을 위한 중요한 해결책도 지속적으로 내놓는다. 

 

 

 

진주만 공격

바로 이때 미국의 원자폭탄개발에 속도를 붙이게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42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었다. 18여 척의 군함과 188여 대의 항공기 파괴, 군인과 민간인 포함 36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미국은 일본과 독일에 전면전을 선포한다. 

 

맨해튼 프로젝트 리더되다. 

이에 오펜하이머는 독일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해야된다는 일념으로 1942년 8월 13일 맨해튼 프로젝트를 가동시키게 된다.  이 프로젝트의 참여인원은 약 13만 명 이 참여, 연구비용 약 20억 달러로 현재 가치로는 약 44조 3천억 원이 투입되었다. 이 프로젝트에는 세계적인 물리학자들이 대거 동참하게 된다. 

 

 

이 프로젝트에서 오펜하이머는 리더가 되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괄 사령관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미 국방부 청사 펜타곤 건설 임무를 맡았고 이를 16개월만에 펜타곤 건설을 성공시키면서 신임을 얻어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수장으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그는 오펜하이머의 핵심을 파악하는데 특출남을 보였고 상대방의 말에 맥락을 바로 이해한 후 그에 따른 문제점까지 바로 파악했고 특히 어학능력과 언변까지 튀어난 오펜하이머가 리더의 자질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유럽 유학파라는 장점도 있었다. 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비밀유지였다. 

 그래서 당시 트루먼 부통령도 모르게 맨해튼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프로젝트는 뉴멕시코의 로스앨러모스 사막이 최적의 부지로 선정되었고 또한 보안을 위해 크고 작은 30곳에서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실험은 인구가 적은 소도시 위주로 진행이 되었다. 로스앨러모스는 핵심 인물들이 극비 실험을 진행하는 곳이었다. 

 

 

우라늄 고농축 핵폭탄은 많이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아 가성비가 좋은 플루토늄으로 핵폭탄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플루토늄에는 불순물이 많아 기존의 방법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워 플루토늄을 감싸고 있는 폭팔물이 터지면 충격파가 안쪽으로 모이면서 플루토늄이 압축되고 핵분열이 시작되는 것이고 축구공 32면체 구조로 만들면 정확하게 한 점에서 플루토늄을 압축할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세계 최초의 플루토늄 원자폭탄 가제트이다. 

 

 

단 10개월만에 만든 핵폭탄이었다. 그런데 핵폭탄이 완성되고 루스벨트 대통령이 갑자기 뇌출혈로 사망하면서 트루먼 대통령이 승계를 받게 되었고 1945년 4월 30일 독일의 히틀러가 항복을 하면서 핵폭탄을 이용해 전쟁을 막겠다던 프로젝트의 목적성이 상실되었다. 유럽의 전쟁을 마무리되었으나 미국와 일본의 태평양 전쟁은 절정에 치달고 있었다. 그래서 핵폭탄 실험은 계속되었는데 1945년 7월 16일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 트리니티 테스트를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계속 보기 ]트리니티 테스트 이후 내용 벌거벗은 세계사 5회와 내용 중복됨.  

 

맨하탄 프로젝트 속 핵폭탄(핵무기) 개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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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원자폭탄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이후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 ,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2차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이후에 오펜하이머는 1946년 원자력 위원회가 창립되고 그곳의 자문위원회를 맡게 된다. 이때 오펜하이머는 대중들에게 각인되며 과학자로써 명성을 얻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과의 대립으로 핵폭탄보다 더 강력한 수소폭탄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이때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 개발을 강력하게 반대했고 이에 그는 정치인들의 눈밖에 나서 수소폭탄 개발 계획에서 철저히 배제당했다.

 

▼수소폭탄 개발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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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명성 추락

또한 미국은 오펜하이머를 스파이로 의심하며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영웅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1954년 4월 원자력 위원회는 청문회를 열고 약 두 달간 무려 19차례나 이어졌다. 이때 오펜하이머는 자신은 소련의 스파이가 아님을 당당하게 주장했다. 그가 스파이로 의심받았던 것은 과거 공산주의자를 후원하고 그들과 교류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공산당원이 아니였기때문에 당당했으나 그의 사생활 이슈가 터지면서 그의 명성은 무너졌다.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 시작전에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으나 프로젝트 진행 중 불륜을 저질렀다. 오펜하이머와 분륜을 저질렀던 진 태트록이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전쟁 영웅에서 공산주의자, 불륜남으로 추락하게 된다. 

 

 

원자폭탄을 개발한 영웅이었으나 원자폭탄이 낳은 냉전의 희생양이 된 오펜하이머는 교직에서 후임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1967년 2월 후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2022년 68년만에 보안인증 자격 박탈 명령 취소가 내려지면서 명예 회복을 할수 있었다. 

 

 

 

 

▼오펜하이머 이후 냉전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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