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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어사 박문수 업적 (나주 괘서 사건) 23회

암행어사의 대명사 어사 박문수가 있다. 박문수는 조선의 대표 암행어사로 기억되고 있으나 그는 사실 한번도 암행어사였던 적이없다. 지방을 감찰하는 어사를 맡았던 적은 있다. 그는 숨어다니는 암행은 하지 않되 지방을 감찰했던 어사였다.  어사를 하면서 백성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해서 백성들에게 정의의 상징 암행어사로 불리게 되었다.  

 

마패- 조선시대 관리들이 공무를 보며 말을 빌릴때 쓰는 것이고 암행어사의 상징
마패- 조선시대 관리들이 공무를 보며 말을 빌릴때 쓰는 것이고 암행어사의 상징


어사 박문수 성격

그러나 조정에서 박문수는 이단아에 미치광이로 취급되었다.  박문수는 왜 조정의 이단아가 되었나?  영남지방에서 돌아온 박문수는 왕에게 직접 전복을 내보이며 영남군수의 비리를 고할만큼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건장한 풍채와 함께 거침없는 언행도 불사했던 인물이었다.  

 

박문수


냉정하고 예민하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영조였지만 서슴없이 직언하는 박문수를 아꼈다. 영조가 박문수를 아꼈던 이유는 과거 박문수가 영조의 선생님이었다. 스승과 제자사이였던 것이다.  1724년 과거 급제한 뒤 34세의 박문수는 31의 영조(연잉군)를 왕의 형이나 동생을 교육하는 세제 시강원에서 만나게 된다.  영조의 형 경종은 즉위 이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영조가 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인좌의 난 진압한 박문
1724년 8월 영조는 왕이 되고 영조 즉위 4년 후 소론세력에 의한 이인좌의 난이 발생한다. 명분은 경종 독살설이었다 . 이때 영조를 위기에서 구한 인물이 반란군 진압의 선봉에 선 인물이 박문수였다.  진압군으로 갔던 박문수의 당파는 같은 소론이었고 진압군의 승리로 이인좌의 난은 진압이 되었다. 그러나 이인좌의 난 이후 같은 파인 소론에도 경계 대상이 된다. 

 

 

박문수의 활약

이인좌의 난에 영남지방의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기 때문에 영남지역을 진정시키려 박문수를 내려보냈고 영남지역의 민심은 차츰 진정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박문수에게 지금의 차관급 종2품 감사로 승진시켰고 난을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공신으로 책봉이 된다.  

 1728년 박문수는 영조의 신임으로 경상 감사로 부임하게 되고 함경도가 홍수가 났다는 소식에 창고의 곡식 3000석을 즉시 함경도로 보냈다. 왕의 승인없이 보냈기 때문에 문책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1731년 가뭄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바다물을 구워서 소금을 만들어 팔아 백성들을 돕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소금을 구워 파는 것은 일부 권력층이 누리는 특권이었다. 왕실 종친과 일부 관청이 독점하던 권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조가 박문수 편을 들어주면서 직접 소금굽는 것을 허락한다.  결국 1만 8천석이라는 소금을 얻게되고 많은 백성들을 구한다.  

 

직접 소금을 굽는 박문수

1732년 긴 흉년으로 녹봉을 삭감하자는 제안을 했고 거친말로 서슴없이 대신들을 꾸짖었다. 영조가 다시 이를 허하면서 박문수는 대신들의 눈밖에 나버렸다. 이에 대신들은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고 영조는 난감했다. 그러나 영조는 박문수를 벌하지 않았다.  

 
1739년 함경도 지역 관찰사로 있던 시절 박문수가 여러 불법 행위(횡령, 뇌물등)를 저질렀으니 탄핵해야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이 상소는 함경도 지방을 감찰했던 어사 홍계희였다. 홍계희의 상소로 결국 박문수는 옥에 갇혀 조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결과는 무혐의였다. 조정에서 쫒아내려는 노론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홍계희


 호전론-> 균역법  
이후에 박문수는 조선의 세금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다.  박문수는 집집마다 양반, 평민상관없이 세금을 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관리들은 강력하게 반발한다. 박문수의 호전은 받아들여지지 않으나 영조는 ㅅㅐ로운 법을 내놓는데 그것이 균역법이다. 군포를 1년에 2필이였던 것이 1필로 감하는 제도였다. 

 



어염세 징수
또한 박문수는 또 다른 제안을 한다. 왕실의 소유인 어장과 염전에서 세금을 걷어 국가 운영에 쓰자는 주장이었다.  영조는 이를 받아들인다.  



 

 

나주 괘서 사건 

조선의 완벽한 이단아로 떠오른다. 예순다섯 원로대신인 박문수는 뜻밖의 사건에 휘말린다. 전라도 나주 객사에 괘서가 붙었다. 영조와 조정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영조는 이인좌의 난때 망한 역적들의 자손이라고 생각했고 이들을 잡아들이도록 했다. 사건을 일으킨 이들은 바로 소론 세력으로 이인좌의 난과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그들을 고문하는 과정에서 배후에 박문수가 있다는 나왔고 계속된 박문수의 이름이 거론되자 영조는 박문수를 잡아들이게 했고 역적과 죄인들을 대질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거짓 진술이 밝혀진 것이다. 옥에서 풀려난 박문수는 고향으로 내려갔고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나이 예순 여섯이었다.  

 

영조실록에 실린 박문수 죽음을 슬퍼하는 영조의 마음
영조실록에 실린 박문수 죽음을 슬퍼하는 영조의 마음


 
박문수의 죽음에 영조는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미움을 받으면서도 백성을 위해 앞장섰다. 늘 백성의 편에 섰던 박문수가 암행어사로 기억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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