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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벌거벗은 세계사

보어 전쟁 : 남아프리카 공화국 수도가 세 개인 이유 153-1

보어전쟁에 참전했던 유명인 

보어인들 정착 배경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에 케이프타운이 위치해 있다. 케이프타운이 널리 알려진 건 대항해 시대이다.  1488년 유럽 최초로 케이프타운을 발견해 동방으로 가는 항로를 독점한 나라가 포르투갈이다. 이때 무역을 통해 많은 이득을 얻자 포르투갈 왕실은 케이프타운 남쪽에 희망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652년 케이프 타운의 운명을 바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진출한다. 동인도 회사는 인도로 가는 여정이 길어 케이프 타운에 정착촌을 건설해 유식처를 제공하려 한 것이 동인도 회사였다. 

 

이곳에는 코이코이족과 산족 (=부시맨)이 살고 있었다. 초반에는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농장 운영과 목축업등 물물교환을 하며 우호관계를 형성했다.  이 네덜란드 정착민들을 자신들을 농부라는 뜻의 보어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원주민들과 보인들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농장을 확대하기 위해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았고 값싼 노동력을 위해 원주민을 노예로 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케이프타운에 노예제가 정착되자 원주민들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다.  원주민들은 노예로 부려지며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작은 잘못이라도 하게 되면 잔혹한 형벌을 받아야했다. 

 

 

 

 

영국 식민지 되다. 

그러나 케이프타운의 원주민들을 또 한번 고난에 빠트린 세력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영국으로 당시 영국은 식민지를 전 세계로 확대해 나가고 있었고 1795년 9월 대규모 함대를 동원해 케이프타운을 공격했다. 이후 케이프타운 점령에 성공한 영국은 이곳을 영국령 케이 식민지로 선포했다. 이때부터 네덜란드와 영국은 약 20년 동안 케이프타운의 식민지 통치권을 두고 싸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영국이 승리하며 네덜란드는 약 2천700억원을 주고 케이프 식민지를 양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케이프 타운에 정착하고 살고 있던 보어인들은 영국의 정책에 반감을 느꼈고 1822년 영국은 케이프 식민지의 공식 언어를 영어로 채택하면서 더욱 갈등이 심화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보어인들은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보어인들에게 반감을 일으킨 정책은 노예해방 정책이었다. 케이프 식민지의 약 35,000명의 노예가 해방이 되었다. 이에 보어인들은 영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떠나기로 했고 이것을 그레이트 트렉이라 부른다. 

 

Great Trek

 

보어인들은 이동을 하면서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과 전쟁을 하며 땅을 빼앗았다. 심지어 보어인들은 노예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나라까지 건설하게 된다. 

 

 

 

보어전쟁 배경 

보어인들은 케이프 타운 북쪽에 나탈리아 공화국, 오렌지 자유국, 트란스발 공화국을 세운다. 영국은 처음에 이 나라들의 자치를 인정했으나 이후 땅을 탐내고 나탈리아 공화국을 침략해 땅을 빼았아버린다. 그리고 오렌지 자유국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고 트란스발 공화국에서도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면서 영국은 보어인들의 영토를 침공하게 된다. 

 

유레카 다이아몬드 현재 가치로 약 5억원

 

 

이것이 보어 전쟁으로 1880년부터 영국의 식민지 팽창에 저항한 네덜란드계 보어인과의 전쟁을 일컫는다. 처음에는 영국이 손쉽게 승리할 것처럼 보였다. 영국의 대규모 군대를 동원한 것과 달리 보어인들은 대부분 농민이었다. 그러나 기습 게릴라 작전으로 맞서 싸운 보어인들이었다 .이에 영국은 본국에서 45만의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게 되고 1902년 결국 영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보어전쟁에 참전했던 유명인 

이때 영국 윈스턴 처칠이 종군기자로 참전했고 이를 계기로 처칠 정치인으로 변신하다. 또한 인도의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도 영국을 동경해 보어전쟁에 자진해서 참전했다. 

 

 

 

남아공 수도 세 개인 이유 

이렇게 보어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남아프리카를 하나로 통합한 후 1910년 영국과 보어인들의 합의로 남아프리카 연방이 시작된다. 이때 남아프리카 연방의 국가 원수는 영국의 군주로 정해졌다.  그러나 영국이 남아프리카 연방을 통치하기에는 보어인들이 월등히 많았다. 그래서 보어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수도를 3개나 만들었다. 이때 정해진 수도가 지금까지도 이어져서 현재 남아공의 수도는 세 곳이다. 

 

수도 프레토리아는 대통령이 사는 유니온 빌딩이 있다.
블룸폰테인은 사법수도로 남아공 대법원이 있다.
케이프타운은 입법수도로 국회가 있다.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보어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또 다른 정책이 아파르트헤이트였다. 보어인들을 우대해주기 위해 영국이 시작한 정책이었다. 이 정책으로 인해 남아프리카 연방은 영국인과 보어인, 소수의 백인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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