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 묘소 테러
1983년 10월 8일 전두환 대통령은 동남아 순방 일정을 위해 미얀마를 찾았다. 다음날인 10월 9일 미얀마의 독립 영웅 '아웅 산' 참배를 위해 국립 묘지를 방문했는데 굉음과 함께 대규모 폭발이 일어났다. 테러가 발생한 것이다. 테러의 타깃은 대한민국 대통령 전두환이었다.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상 초유의 폭탄 테러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미얀마인 포함 사망자 총 21명, 부상자 총 46명이 발생했고 대한민국 행정부 내각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이 사건 이전에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 007 기가 소련 영공에서 격추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탑승자 전원 사망하며 소련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 한달 뒤 다시 대통령 테러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북한 테러 증거
이때 클레이모어 지뢰라는 대량 살상 무기 2개와 소이탄 (화재를 일으켜 목표물을 파괴하도록 설계된 무기) 이 설치가 되어 있었다. 다행히 소이탄은 불발이 되었고 소이탄이 터졌을 경우 증거가 모두 인멸될 뻔한 상황이었다.
미안마 폭파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1970년 6월 현충문 폭파사건이 있었다. 현충문 폭파 미수사건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현충문에 폭발물을 설치하다 실패한 사건으로 다행히 미수에 그쳤던 테러사건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아웅 산 묘소에 클레이모어 지뢰를 설치했던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 보복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테러 시도한 사건으로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그냥 넘어갈수 없던 일이었고 전두환 대통령은 테러 다음날 10월10일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서둘러 귀국하고 기자 회견을 통해 반드시 응징하겠다고 선언 후 전군 비상 경계령을 발령했다. 데프콘 3호가 발령되었다. 데프콘 3호는 역사상 딱 두번 있었다. 1976년 도끼만행사건과 1983년 미안마 아웅산 테러 사건이다.
대통령 테러 사건이었으나 이 테러로 17명의 국무위원과 수행비서 언론인이 대거 사망했던 테러였다. 이에 남한은 육사 12기를 중심으로 김일성 암살 작전을 기획했으나 갑자기 전면 취소된다.
전두환은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인물이라 국민보다는 미국의 눈치를 보던 상황이었고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 무력충돌을 원하지 않아 이를 반대하면서 보복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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