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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준명당 이야기 : 고종의 옹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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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에서 사랑받은 옹주들이 많지만, 고종만큼 딸을 극진히 아꼈던 왕도 드물다.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은 나라를 지키려 애쓰는 한편, 개인적으로는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중에서도 그의 늦둥이 딸 덕혜옹주를 향한 사랑은 각별했다. 덕혜옹주가 태어나기 전부터 고종은 그녀를 위한 공간을 궁궐 안에 마련하려 했고, 그 결과 1906년(광무 10년) 덕수궁 내에 "준명당(浚明堂)"을 건립했다.

 

덕수궁내 준명당

 

고종의 옹주 사랑

보통 아기가 태어나면 왕은 일주일 뒤에 찾아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고종은 바로 다음날 찾아갔다. 생후 2개월 된 덕혜옹주를 왕의 침전 옆인 함녕전에 옮겨 오도록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덕혜옹주를 보러 함녕전에 들렸다고 한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준명당에 옹주만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  


 

 

준명당의 역할과 유래

준명당은 단순한 별궁이 아니라, 덕혜옹주의 생활과 교육을 위한 공간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서구식 교육제도를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었고, 왕실 자녀들에게도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덕혜옹주는 준명당에서 한문(한학)뿐만 아니라 서양식 교육도 받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유치원처럼 여러 아이들이 함께 모여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덕혜옹주 개인을 위한 학습 공간이었다. 왕실에서는 어린 왕족들이 궁궐에서 개별 교사를 두고 교육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덕혜옹주도 마찬가지였다.

 

 

"왕실 유치원"이라는 오해의 이유

준명당이 흔히 "왕실 유치원"으로 불리는 이유는,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기초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식 교육기관으로 운영된 것이 아니므로, 실제 유치원 개념과는 다르다.

 

고종은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로, 정치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만큼은 남달랐다. 특히 딸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았으며, 덕혜옹주에게는 더욱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준명당에 난간에 파인 홈은 덕혜옹주가 다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난간을 설치한 흔적이다.

 

당시 황실에서는 왕자들보다 공주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고종은 그러한 관례를 따르지 않고, 덕혜옹주의 교육과 생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직접 학자를 불러 한글과 한문을 가르치게 하고, 예술과 서예에도 능통하도록 교육을 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정원을 가꾸고, 놀이를 마련해 주는 등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대한제국이 일제의 압박으로 무너지고, 고종이 강제 퇴위당한 후부터 덕혜옹주의 운명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덕혜옹주의 어린시절은 명랑 발랄했고 밤을 줍는걸 좋아했고 시중들 앞에서 노래와 춤추는것을 좋아했다. 8살 전까지가 덕혜옹주의 전성기라고 말할수 있다.

 

준명당과 덕혜옹주의 슬픈 운명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완전히 병합되었고, 덕혜옹주는 더 이상 보호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으며, 결국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후 일본 귀족과 강제 결혼을 하게 되었고, 불행한 결혼 생활과 병으로 인해 힘든 삶을 살게 되었다.

 

준명당은 그녀가 궁에서 행복했던 마지막 기억이 담긴 공간이었다. 하지만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끌려간 이후, 준명당은 점차 잊혀지기 시작했고, 대한제국 황실의 흔적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갔다. 다행히도 오늘날 덕수궁 내에서 복원되어 남아 있으며, 방문객들은 이곳을 통해 대한제국의 마지막 공주가 누렸던 짧은 행복과 고종의 부성애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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