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부여읍 금강에는 낙화암이 있다. 낙화암 밑에 고란사라는 사찰에는 낙화암에서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치마폭으로 얼굴을 감싸고 백마강에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는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런 전설은 사실 근거는 없다.
백제 31대 의자왕은 우왕의 아들로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 간에 우애가 깊으며 용맹하며 유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의자왕 즉위 직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결국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에서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마지막 백제의 항전지가 낙화암 부근이었다.
의자왕은 여색을 밝히고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충신을 쫒아내는 등 유독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은 왕으로 그려진다. 왕에게 가장 치욕적인 평가는 주색에 빠져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것인데 의자왕이 그렇다. 의자왕의 삼천궁녀 이야기는 삼국사기 기록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야사인 삼국유사에는 부여 북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궁인들이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만 있다.
문서에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있는데 조선 초 시집 [속동문선 제 5권] 에 삼천궁녀가 언급된다. 그러나 조선 후기 궁녀의 수는 약 500명정도였는데 총인구 5만인 조그만 백제에 무슨 삼천궁녀가 있었겠는가?
삼국사기 제 6권에 전쟁이 끝난 후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 주민 12,807명을 당나라로 압송하였다. 삼천궁녀 이야기의 근거지는 신라의 입장에서 의자왕이 주색을 밝히고 방탕한 왕이라야 신라, 당나라 연합이 정당화 되기 때문에 승자인 신라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꾸며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게 1500년간 이야기가 부풀려지면서 의자왕과 삼천궁녀 이야기가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조룡대에 대한 이야기도 당나라 장수 소정방 위인전처럼 전해진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풍랑을 만나 진군할 수 없게 되었는데 백제 무왕의 화신 '청룡' 이 이 강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소정방은 이곳 조룡대 바위에서 백마 머리를 미끼로 청룡을 낚아 올렸다고 한다. 낚을 조, 용 룡 조룡대이다. 소정방 즉 점령군 장군에 대한 숭배는 늘 있는 일이나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기록상으로 보면 한, 두명이 그랬을 가능성은 있지만 의자왕과 삼천궁녀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때 우리 역사를 왜곡 , 날조한 것이다. 일본은 특히 자신들의 문화에 영향을 많이 미쳤던 백제에 대해 왜곡을 많이 했었는데 모르는 사이 우리 국민조차 의자왕의 왜곡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상세버전 보기) 의자왕 삼천궁녀의 낙화암 이야기 in 구드래 나루터 선착장
의자왕과 김춘추의 복수극(백제 멸망 과정)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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