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History 썸네일형 리스트형 조선 최초 전차 개통 이유 조선 최초의 전차, 왜 개통되었을까?1899년 5월, 조선에서 최초로 전차가 개통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였으며, 당시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대한제국의 중요한 근대화 사업 중 하나였다. 그런데 전차가 개통된 이유가 단순한 교통 편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차 도입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고종 황제의 잦은 능행(왕릉 참배)이었다. 능행 비용 절감을 위한 전차 도입고종은 왕릉을 자주 찾았는데, 특히 청량리 홍릉(명성황후의 능) 방문이 많았다. 문제는 능행 때마다 많은 인력과 비용이 들었다는 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차 도입이 건의되었고, 결국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를 잇는 노선이 개통되었다. 하지만 정작 고종은 전차를 이용하지 않았다. 이유는 전차의 모습이 조선의 전통.. 더보기 명성황후 장례식 (유해 수습은 누가? 장례식에서 무슨일이? ) 1895년 10월 8일 조선의 국모였던 명성황후는 일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다. [이전글]을미사변 명성황후 장례 전 명성황후 남은 유해는 어떻게 했을까? 당시 조선군 훈련대 참위였던 윤석우가 불에 탄 시신을 목격했으나 누구의 시신인지 알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이에 조선군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이 타고 남은 시신을 연못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윤석우는 왕비의 시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몰래 시신을 수습한다. 온전치 못한 하반신만 겨우 수습한 후 오운각 서쪽 산 아래에 매장했다가 명성황후 사망 발표 후 겨우 빈전( 관을 모시는 전각)으로 모셔진 유해이다. 명성황후 유해 수습에 대한 기록은 매천야록( 선비 황현이 기록한 조선 말기 비사)에 조금 남아있다. 유골과 재가 섞여 있었고 장례에 익숙한 환.. 더보기 창덕궁을 만든 이유는?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다. 그래서 왕이 가장 오래 머물러 있는 궁을 생각하면 경복궁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으나 실제로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이다. 궁궐의 역사를 보면 경복궁은 약 225 년이고, 창덕궁은 약 500년 이고 창경궁은 약 420년 정도이다. 조선 전기에도 경복궁이 있었으나 왕이 다른 궁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조선 전기에도 양궐 체제로 법궁과 이궁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었다.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이용했던 이유 1394년 태조 이성계는 한양 천도후 경복궁을 조성했다. 조선의 3대 왕 태종 5년 창덕궁 창건을 명했다. 조선 후기 왕들도 임진왜란 이후 소실된 경복궁을 재건하지 않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원하고 경희궁을 신축했다. 그 이유는 2대 왕 정종이 t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천도했다... 더보기 을미사변 역사저널 393회 을미사변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한 나라의 국모가 일본인에게 무참히 살해된 사건이다. 1895년 주상전하-> 대군주 폐하, 왕비전하-> 왕후 폐하로 변경 , 1897년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 선포되면서 왕후에서 황후로 지위 상승했다. 이에 명성황후를 민비로 부르는 것은 격을 낮춰 부르는 호칭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명성황후를 많이 사용하는 추세이다. *시해는 부모나 임금 등 윗사람을 죽일 때 쓰는 말이고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살해로 써야 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내용은 각국 외교관의 보고서 회고록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일본인들이 건천궁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를 발견하고 밖으로 끌어내 무자비하게 살해한 것은 틀림없는 .. 더보기 고종 장례식 (인산일) 모습, 의미 조선의 마지막 황제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하여 1919년 1월 20일 68세로 생을 마감한다. 고종황제의 장례는 패망 군주의 장례식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본 귀족의 장례 절차에 준하여 고종의 장례는 치러진다. 특히 일본식 국장을 기본으로 하고 조선식 예법이 가미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산릉을 조성하는데만 1만 여명 이상의 인력과 엄청난 물자가 동원되는 것이 국상이다. 왕의 첫 번째 임무가 국상인데 조선시대 오례에 관한 의식절차를 기록한 책 국조오례의를 보면 국왕이 승하하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5개월이 소요된다. 그 후 삼년상 약 60가지 절차를 거쳐야 한다. 동빙고에 저장된 얼음으로 시신을 보존했고 대나무 평상에 시신을 안치하고 얼음을 갈아주면서 시신을 오랬동안 보존했다. 조선의 국장 행.. 더보기 하멜 표류기 이야기 38회 하멜 표류기는 유럽에서 조선을 본격적으로 알린 최초의 책으로 네덜란드인 하멜이 낯선 조선 땅에서 보낸 약 13 년간의 표류 생활이다. 17세기 조선 제주도를 그린 이 그림은 외국에서 쓴 헨드릭 하멜이 쓴 하멜 표류기에 있는 그림이다. 하멜일행 제주도 표류 1653년 8월 23살 하멜을 포함 총 64명의 네덜란드 선원들은 바다를 항해하던 중 태풍에 휩쓸려 암초에 부딪혀 배가 산산이 부서졌다. 얼마 후 살아남은 하멜은 조선의 제주도에 표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하멜은 자신의 동료를 찾았고 64명 중 36명만 살아남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얼마뒤 멀리서 말총을 짠 모자를 쓴 조선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들도 하멜을 보고 그냥 돌아가버렸다. 그리고 표류 3일차 되던 날 1~2천여 명의 군사들이 들이닥쳐 .. 더보기 종묘사직이란?/ 종묘 정전/ 종묘에 공민왕을 모신 이유 종묘사직이란? 종묘사직을 줄여서 종사라고 하는데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고 사직은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는 단이다. 좌묘우사로 정궁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배치했다. 종사는 곧 국가 자체이다. 종묘사직의 제사가 단절이 되었다는 것은 나라가 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묘를 가보면 종묘대로가 있는데 굉장히 복잡하고 시끄럽다. 그러나 경내로 들어가는 순간 조용하다. 임진왜란 당시 도심의 궁궐이 모두 불타서 종묘만 남아 있었으므로 왜의 대장 평수가가 종묘에 거처하였는데 밤중에 괴이한 일이 많이 벌어졌다고 한다. 따르던 부하가 갑자기 죽는 일도 생기고 해서 왜이러냐고 부하에게 물어봤더니 어떤 사람이 이곳은 조선의 종묘로서 신령이 있는 곳이라고 하자 평수가가 두려워하여 종.. 더보기 문정왕후는 태릉에 왜 홀로 묻혔나? [역사저널 392회] 태릉의 상징 중 하나는 태릉선수촌 1966년 6월 국가대표선수의 강화 훈련을 위해 설립된 종합 선수합숙훈련장이 있고 태릉갈비도 유명하다. 또한 문정왕후 단릉인 태릉이 있다. 조선 왕릉은 총 15기의 단릉이 있는데 그 중에 왕비 홀로 묻힌 단릉은 총 12기가 있다. 12기의 왕비 단릉 중 태릉이 가장 큰 것이다. 그렇다면 문정왕후의 능이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며 왜 홀로 묻히게 되었을까? 사실 문정왕후는 남편 중종의 능이 있는 정릉에 묻히고 싶어했다. 그러나 중종과 약 14km 나 떨어져있는 곳에 홀로 묻히게 된다. 문정왕후 비판하는 이유조선왕조 기록에는 문정왕후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암탉 문정왕후로 인해 나라가 망한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비판의 이유는 .. 더보기 나당전쟁 이유 - 석문전투, 천성전투 문무왕 22세 때 문무왕의 아버지 김춘추 나당연합을 성사시켰다. 당시 신라를 압박하고 있던 백제 의자왕으로 인해 왜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던 김춘추였으나 모두 거절했고 당나라로 발길을 옮겨 당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645년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려에 대패한 당나라도 신라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에 648년에 나당연합이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을 아들 문무왕은 옆에서 지켜보며 배웠던 것이다. 그러나 김춘추가 돌아온 지 2달 만에 당 태종이 사망하면서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로 인해 진덕여왕을 움직여 비단에 수를 놓아 태평송을 당에 보냈고 이 태평송을 당시 20대였던 김법민(문무왕)이 직접 바쳤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고 이 과정에서 문무왕에게 모멸감을 준 사건이.. 더보기 영릉 (세종대왕 왕릉) 이 옮겨진 이유는? [역사저널 391회 ] 능은 죽은 왕, 왕비등 죽은 자들을 위한 공간이지만 능을 조성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능 위치, 조성방식은 후대인의 정치적 입장이 반영된 경우가 많다. 왕릉은 죽은 사람의 공간이기 보다는 산 사람들의 정치 공간이라고 볼수 있다. 재위 2년만에 문종이 서거하면서 단종이 즉위하게 된다. 충신들에게 힘있는 수양대군은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이자 멀리해야 하는 존재였다 .이에 수양대군은 살아남기 위해 김종서에게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1453년 단종 1년 발톱을 드러낸 수양대군이었다. 무력으로 조카인 단종을 밀어내고 왕의 자리에 오른것이다. 그러나 야심의 대가인지 세조의 뒤를 이를 맏아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난다. 세조는 이 비극을 아버지 세종의 능을 옮기는 것으로 비극에서 벗어나.. 더보기 이전 1 ··· 33 34 35 36 37 38 39 ··· 4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