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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명성황후 장례식 (유해 수습은 누가? 장례식에서 무슨일이? )

1895년 10월 8일 조선의 국모였던 명성황후는 일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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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장례 전 

 

명성황후 남은 유해는 어떻게 했을까?  
당시 조선군 훈련대 참위였던 윤석우가 불에 탄 시신을 목격했으나 누구의 시신인지 알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이에 조선군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이 타고 남은 시신을 연못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윤석우는 왕비의 시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몰래 시신을 수습한다. 온전치 못한 하반신만 겨우 수습한 후 오운각 서쪽 산 아래에 매장했다가 명성황후 사망 발표 후 겨우 빈전( 관을 모시는 전각)으로 모셔진 유해이다.  

 

녹지로 옮겨지는 유해


 명성황후 유해 수습에 대한 기록은 매천야록( 선비 황현이 기록한 조선 말기 비사)에 조금 남아있다. 유골과 재가 섞여 있었고 장례에 익숙한 환관을 불러 유골이 없는 곳은 석회를 넣어 보충 비단으로 된 어북 수십 벌로 여러 번 감아 재궁에 넣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명성황후의 유해를 수습했던 윤석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뜻밖에도 윤석우는 사형에 처해진다. 사형 이유는 사건 당시 의심스러운 행적과 명성황후의 유해를 멋대로 처리한 죄로 사형에 처해진 것이다. 명성황후의 죽음이 공식화된 상황에서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고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은 일본으로 소환되었고 조선인 주동자들도 일본으로 망명을 가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윤석우는 재판에서 끝까지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아관파천 이후 무고함을 인정받아 직급이 높아지고 유족들에게 위로급도 지급되었다. 

 

윤석우 교수형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명성황후의 유해가 수습이 되고 장례가 치러지지만 홍릉에 묻히기까지 상당히 긴 역사가 있다.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환구단에서 황제 선포 후 궁으로 돌아와 명성황후를 황후로 격상시키고 황후의 장례식을 한다. 1897년 11월 21일 명성황후의 국장일이었다 . 대한제국 선포 후 약 한 달 만에 치러진 국장이었다. 고종황제 즉위식 이후 고종의 첫 번째 공식행사이자 명성황후 시해 2년 2개월 만에 치러진 장례식이었다. 이후 청량리 홍릉에 명성황후의 유해가 묻히게 된다.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 거행

 

명성황후 장례 비용

이틀간 성대하게 치러진 명성황후의 장례식은 정말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렀다. 홍릉 조성, 장례비용은 약 100만 달러로 장례에 사용된 양초 값만 6500달러였다. 뿐만아니라 장지인 청량리에 만 달러를 들여 임시 건물을 세워 외국인 숙소로 사용, 일류 요리사를 동원 12가지 코스 요리도 대접했다.  

 



화려한 장례 이유

고종 황제 즉위식도 지나치게 성대하다는 비판이 존재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내에 중국에 대한 사대를 주장하는 여론이 많았고 조선의 독립을 의심하는 외국도 많았기 때문에 주권 국가 통치자로서의 자격을 보여준 정치적 행위였다. 화려한 명성황후 장례식도 마찬가지였다. 대한제국이 황제국임을 보여주는 정치적 퍼포먼스였다.  고종은 명성황후 홍릉을 통해 대한제국을 알리려 했다.

 

명성황후 국장일
화려한 장례

1905년 9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가 방한한다. 당시 순방단의 대표 당시 육군장관 미국 제27대 대통령 윌리엄 태프트도 있었다. 태프트 장관은 일본 중국 방문 후 미국으로 돌아가고 앨리스는 일행 일부와 함께 대한제국으로 온다. 미국 대통령의 딸이 방한했기 때문에 성대하게 맞이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와 딸 앨리스
미국 27대 대통령 윌리엄 태프트

 

홍릉 연회에서 무슨일이? 
연회를 홍릉에서 준비를 했다 . 당시 고종의 후궁 엄비는 빚을 내 선물을 준비하기도 했고 홍릉을 선정한 이유는 홍릉에서 연회를 즐기면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고종이 앨리스에게 공을 들인 이유는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했고 고종은 러일전쟁에 중립을 선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러시아는 러일전쟁으로 대한제국을 짓밟는다. 그래서 강대국 미국에 다시 한번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는 고종이 최대한 격식을 차려 접대하는 동안 모든 것을 장난처럼 받아들인다. 홍릉의 석마 위에 올라타 사진을 찍었다. 다른 문화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는 얘기다.   

 

 

 

을사늑약 체결
 그러나 더 충격적인 것은 태프트는 이미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대한제국과 필리핀에 대한 상호지배를 승인한 비밀협약이었다. 이것은 고종이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외교에 대한 힘이 전혀 없었다. 앨리스가 떠나고 2달 뒤 1905년 11월 17일 고종을 압박해 일본은 강제적 조약을 맺는다. 그것이 바로 을사늑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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