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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드라마 < 7일의 왕비 > 단경왕후는 누구?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 주인공 드라마 7일의 왕비는  조선 11대 왕 중종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이다. 연산군 이복동생 진성대군 중종은 총 3명의 비를 맞이하게 되고 박민영 배우가 했던 역할이 단경왕후(1487~1557)로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이다. 단경왕후 집안 단경왕후 신 씨는 익창부원군 신수근과 청원부원군 한 씨의 딸로 조선시대 역대 왕비 중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왕비이다. 그녀의 집안 거창 신 씨는 성종과 연산군 때 권력을 잡고 있던 최고의 명문가로 그녀의 고모는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 씨, 아버지 신수 군은 좌의정으로 연산군의 처남, 작은어머니가 예종의 비 안순왕후의 여동생일 정도로 조선 역대 왕비를 통틀어 보기 드문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리고 단경왕후는 13세의 나이에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과 혼례를 올리게 된다.. 더보기
남원 광한루 역사 황희 정승이 지은 누각이었다. ! (1-1) 광한루의 역사 광한루는 보물 281호이다.  남원에 광한루는 호남 제일루라 불리는데 황희가 오랜 유배생활을 할때 지은 것이다. 광한루는 원래 황희 정승의 광통루로 불리던 작은 누각에서 시작된다. 이와 관련된 기록이 광한루 안에 있다.      광한루기 내용 많은 편액 중에 광한루기에는 황희 정승의 셋째 아들 황수신이 쓴 것으로써 제일 자세하게 그때 상황을 표현해 놓았는데 기록에 보면 남원부에 남쪽으로 2리 떨어진 곳에 1리는 지금 계산해보면 400미터 정도로 약 8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지세가 높고 평평해 바람이 잘 통하는 넓은 곳에 황희 정승이 누각을 짓고 그 이름을 광통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앞에는 지리산에서 흘러나온 물(요천) 이 아름답게 흐르는 곳에 누각을 세우고 산수를 즐겼다.  광통.. 더보기
광한루 유교와 도교의 이상세계 (1-2) 이전글 ->남원 광한루 역사 황희 정승이 지은 누각이었다. ! (1-1)광한루 뜻1444년  세종 26년에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이곳을 한번 지나가면서 이곳의 광한루에 올라가 풍광을 보고 이곳은 지금 지상의 세계가 아니라 달속에 있는 아름다운 궁전 즉 광한청허부와 같다고 하여 그때부터 이곳을 광한루라고 부르게 되었다. 광한루의 의미는 달속에 있는 아름다운 궁전과 같다는 의미이다. 광한은 아름다운 곳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시원한 곳을 뜻하기도 한다.     광한루 호수 속 세개의 섬광한루는 신선이 사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천상의 세계를 갈망해 온 선비들이 지상에 재현해 놓은 이상적인 공간으로 유교와 도교의 사상이 집대성 된 것이다. 황희 정승이 건립한 광통루로 25년 후 하동부원군 정인지로부터 얻게된 이름 광한.. 더보기
남원 춘향제의 기원 (일제시대 감옥소였던 광한루 1-3) 이전글  ->광한루 유교와 도교의 이상세계 (1-2)일제 감옥소 광한루일제 시대에 광한루도 역시 시련이 있었는데 루 위에는 일본 사람들의 재판소로 사용되었고 루 밑에 1910~1918년 18년 동안 독립투사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광한루 기둥 곳곳에 문을 달았던 흔적들을 볼수 있다.    춘향제 기원 광한루는 조선 후기 소설 춘향전의 무대가 된 곳으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곳으로 유명하다. 일제 시대 탄압이 심해질수록 우리 것을 지키려는 남원 사람들의 민족 의식도 강해져서 춘향의 굳은 절개와 정절을 기리는 춘향 사당이 광한루 한편에 세워졌다. 춘향 사당은 1931년도에 세워졌다.  그때 남원 예기 최봉선이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전국을 돌면서 공연을 하고 모금활동을 해서 이 사당을 .. 더보기
황희 정승 이야기 42회 황희는 조선 역사상 최장기 제상에 있었고 87세에 은퇴를 했다. 1363년 고려말 황희는 개경에서 태어났는데 어릴때 부터 영특해서 읽은 건 잊지 않는 총명함으로 남들과 달랐다. 황희가 처음 관직에 오를때는 고려 32대 왕 우왕(재위 1374~1388) 시기였다. 14세~ 30세 황희는 고려 , 조선시대에 공신 혹은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를 채용하던 음서제도에 의해 관직에 14세에 나갔다. 그리고 27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 학관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3년 후 실직하게 된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개국 후 이성계(태조)가 다시 황희를 찾았고 황희의 능력과 인품을 높이 사 직접 조선 관리로 임명한다. 그렇게 황희는 고려 우왕 창왕 공양왕에 이.. 더보기
황희 서달 살인사건 은폐하다. 이전글 서달 살인사건 황희가 좌의정 승진 전 고위 관직자의 아들 서달이라는 선비가 지금의 청주 지역인 신창현을 지나고 있었는데 마을 관아의 아전과 마주치고 아전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아전을 찾아오게 했으나 이미 그 아전은 사라진 뒤였다. 이에 서달은 다른 아전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고 이를 말리던 또 다른 아전을 종을 시켜 때리게 했다. 그런데 그 아전이 매질에 사망한 것이다. 서달은 황희의 사위였다. 이에 황희는 신창현의 관리를 찾아가 사건 합의를 위한 청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서달의 아버지는 형조판서였기 때문에 죽은 아전의 가족에게 뇌물을 주며 합의를 강요한 관리들로 인해 합의서를 제출하게 되고 살인사건은 서달의 종이 저지른 일로 종결되는 듯 했다. 황희 65세에 감옥가다. 그.. 더보기
삼궤구고두례 = 삼배구고두례 진짜 의미는? (삼전도의 굴욕 이유있다) 이전글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을 일으킨 이유 병자호란 발발 8개월 전 병자년 4월 11일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가 된다. 황제 즉위식에서 만주와 몽골에 투항한 명나라 출신 신료들까지 삼궤구고두의 의 예를 갖추었다. 하지만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 두 사람만은 끝까지 절하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홍타이지는 조선 정벌을 결심한다. 조선 사신들이 절을 하지 않은 이유 사실 나덕헌과 이환은 즉위식에 초청된 사람들이 아니였다. 정기적으로 춘신사로 파견되어 오던 사신이었다. 당시 청의 국제적 지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조선의 사신들이었다. 국가 안보를 위해 주변 정세 파악은 필수인데 당시 황제 즉위식의 국제적 의미를 모르고 있던 것이 큰 문제였던 것이다. 조선의 사신들이 절을 하지 않은 이유.. 더보기
조귀인 인조가 가장 아낀 후궁 인조는 44살에 얻은 효명옹주를 애지중지했다. 인조는 효명 옹주를 아낀데는 이유가 있었다. 효명옹주 탄생 1년 전 1636년 병자호란이 있었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심지어 아들 셋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야 했던 인조였다. 27년을 함께 살았던 인열왕후도 전쟁 1년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을 겪고 태어난 효명옹주였다. 이런 효명옹주를 낳은 사람이 조귀인이었다. 조귀인은 효명옹주를 낳기 전까지는 종4품의 숙원이었으나 딸을 낳고 정식 후궁이 된 조귀인이다. 조선 16대 왕 인조의 후궁 조귀인은 인조가 생애에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후궁이다. 조귀인은 누구? 조귀인은 효명옹주를 낳을 당시 일개 후궁이었다. 조귀인의 입궁시기는 1630년으로 인조 즉위 8년째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조는 조귀인을 .. 더보기
김유신은 어떻게 추존왕까지 되었나? 39회 천년가까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도시전체가 박물관이라 불리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묘는 12 지신이 새겨져 있을 만큼 크고 왕릉과 같은 위용을 자랑한다. 신라의 명장이자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김유신은 가야 왕족 혈통이었다. 가야 출신 김유신 신라 진골되다. 가야는 연맹국가로 금관가야 출신으로 42년 김수로왕에 의해 세워진다. 금관가야는 가야연맹의 초기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성장한 나라였다. 금관가야의 10대 왕은 구해왕(김구해: 재위 521~532)으로 김유신의 증조 할아버지였다. 구해왕이 집권하던 6세기경 금관가야는 위기에 빠진다. 가야연맹은 적국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나라로 영토 확장을 위해 신라는 가야연맹을 공격했다. 구해왕은 신라 법흥왕에게 찾아가 항복을 했고 이를 받아들인 법흥왕.. 더보기
갑신정변 (김옥균 능지처참 왜?) 41-2 이전글 갑신정변 이전 상황 (통리기무아문 별기군 설치, 임오군란) 41-1 1884년 8월 베트남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프랑스사이에 청불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 청나라 군대 절반이 빠져나간다는 것이었다. 이에 김옥균은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1884년 10월 17일 조선의 수도 한성 우정총국(=우체국)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우정총국은 조선 26대 왕 고종은 우편 업무를 담당하도록 세운 근대적 기관으로 10월 17일은 우정총국 설립 축하 연회날이었다. 당시 우정국 총책임자 홍영식을 중심으로 김옥균 민영익 등 조선 고위 관료들과 미국, 영국, 청나라등 각국 외교관들이 한데 모인 연회장이었다. 갑신정변 당일 정변을 계획하면서 김옥균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