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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을미사변

역사저널 393회 
을미사변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한 나라의 국모가 일본인에게 무참히 살해된 사건이다. 1895년 주상전하-> 대군주 폐하, 왕비전하-> 왕후 폐하로 변경 , 1897년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 선포되면서 왕후에서 황후로 지위 상승했다. 이에 명성황후를 민비로 부르는 것은 격을 낮춰 부르는 호칭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명성황후를 많이 사용하는 추세이다.  

*시해는 부모나 임금 등 윗사람을 죽일 때 쓰는 말이고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살해로 써야 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내용은 각국 외교관의 보고서 회고록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일본인들이 건천궁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를 발견하고 밖으로 끌어내 무자비하게 살해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후 명성황후 시신을 문짝에 얹어 운반했고 경복궁 내부에 위치한 구릉형태의 녹지인 녹산으로 옮겨가서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태웠다. 일본은 을미사변 언급 자체를 꺼리고 있다. 

 

일본인 진입 경로

 


을미사변은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2021년 11월 일본 아사히 신문을 통해 보도된 내용이 있다. 시해에 가담한 일본 외교관이 직접 쓴 편지가 있다. 이것은 일본 정부의 개입을 증명하는 자료로 당시 조선 공사관 영사보 호리구치 구마이치가 1895년 10월 9일 을미사변 다음 날 고향 친구에게 보낸 편지이다. 

 

조선 공사관 영사보 호리구치 구마이치 


이제까지 일본은 민간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고 하여 사과도 없었던 일이었는데 이번 편지로 인해 조직적으로 일본이 개입한 것이 밝혀진 것이다. 편지는 시해 가담 외교관이 직접 남긴 1차 자료로 더욱 의미가 있다. 일본 외교관, 군인, 낭인과 조선군의 훈련대가 동원된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의미사변이었다. 을미사변을 진두지휘한 일본 공사 육군 출신 미우라 고로는 명성황후 시신을 태울 것을 명령한 장본인이다.  

 

을미사변을 진두지휘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


 
일본인은 왜 명성황후 시체를 불태웠나?  

명성황후 시신을 불태운 이후는 시해 사건의 증거를 인멸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사건 직후 미우라 고로는 일본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한편으로는 고종을 협박해 친일 내각 김홍집 내각을 수립했고 이후 이 친일 내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왕비가 죄를 지어 궁궐을 떠났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리고 1895년 10월 10일 (음력 8월 22일) 명성황후를 폐서인 조칙을 발표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살아 있는 것처럼 거짓 발표를 한 것이다.  

 

당시 김홍집 내각에서 발표한 명성황후의 죄

김홍집 내각이 발표한 명성황후 죄


명성황후 민씨 일가는 당시 횡포가 심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사람이 흘린 이야기를 믿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나중에 사실이 밝혀지더라도 빠져나갈 틈을 만든 일본과 친일 내각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본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다. 명성황후 폐서인 조칙에 가장 먼저 반발한 이는 왕태자 순종이었다.

 

순종은 왕이 되고 난 후 김홍집 내각에서 폐서인 시킨 명성황후를 다시 빈으로 승격시켰고 서양인 목격자들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또한 고종이 직접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폐서인 조칙을 인정하지 않았던 외국 공사들이다.

 

미국신문에 보도된 명성황후 시해 사건

 

결국 1895년 11월 26일(음력 10월 10일) 명성황후의 지위는 빈에서 황후로 복위되었다. 그러나 장례를 바로 치르지는 못했다. 을미사변 55일 뒤 명성황후 사망이 공식 발표되었고 그 후에 본격적으로 장례 준비가 시작되었다.  이후 건천궁 곤녕합 옥호루에서 고종, 태자, 신하들이 곡을 하며 죽음을 애도했다.   

 

곤녕합 옥호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