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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고종 장례식 (인산일) 모습, 의미

조선의 마지막 황제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하여 1919년 1월 20일 68세로 생을 마감한다.  고종황제의 장례는 패망 군주의 장례식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본 귀족의 장례 절차에 준하여 고종의 장례는 치러진다. 특히 일본식 국장을 기본으로 하고 조선식 예법이 가미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고종 덕수궁 함녕전 승하 기사

 

산릉 조성

 

산릉을 조성하는데만 1만 여명 이상의 인력과 엄청난 물자가 동원되는 것이 국상이다. 왕의 첫 번째 임무가 국상인데 조선시대 오례에 관한 의식절차를 기록한 책 국조오례의를 보면 국왕이 승하하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5개월이 소요된다. 그 후 삼년상 약 60가지 절차를 거쳐야 한다. 

 

동빙고에 저장된 얼음으로 시신을 보존했고 대나무 평상에 시신을 안치하고 얼음을 갈아주면서 시신을 오랬동안 보존했다. 

시신보존방식
조선식 장례 행렬
방상씨 탈 모습

 

조선의 국장 행렬에 반드시 등장하는 방상씨 탈은 행렬 앞에서 악귀나 잡귀를 쫓는 의미가 있다. 

 

고종 장례식 모습 

 

고종의 관을 실은 일본식 대여 행렬이 있었고 고종의 혼을 모신 조선식 신연 행렬이 완전히 분리되어 이동했다. 위패와 시신이 따로 이동했던 것이다. 국장은 조선총독부가 임시로 설치한 장의괘에서 주관했고 왕릉 조성, 매장은 이왕직에서 맡아 조선식으로 진행했다.

 

왕의 관을 실은 대여 행렬은 훈련원의 국장식장으로 향했고 신주를 모신 신연행렬은 동대문 밖에서 대여 행렬과 합류했다. 그리고 장지인 남양주 홍릉까지 이동하게 되었다.  

 

일본식, 조선식 행렬 따로 진행



 고종의 일본식 장례

고종황제의 장례는 대부분의 행사가 축소되거나 변형되었다. 통상 5개월 정도가 걸리는 인산(발인) 절차가 40여일로 축소되었고 일본식 장례의 상징, 신목, 사카키라는 신나무가 함께 했고 군악대와 기마대까지 동원했다. 특히 일본 해군의 군악대는 당시 조선식 장례에서 금하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의식을 진행했다.

 

일본 장례 상징 신목
신목 행렬

 

왕의 국장은 많은 인파가 몰리는 큰 행사로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만 40만 명이 넘었다. 그래서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일제의 지배와 무력을 과시한 고종의 장례식을 주관하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한 행사였던 것이다.  

 

고종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모인 인파
일본식 절차 훈련원 국장식장으로 향한 대여 행렬
군악대와 기마대까지 동원



 고종의 장례식을 기록한 윤치호의 일기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윤치호의 당시 상황 기록

일본식 장례를 무력하게 지켜보고 치욕을 느낄수 밖에 없던 조선인의 상황이 일기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고종 장례식 의의

고종의 국장을 계기로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고종의 장례식이 3.1운동을 촉발했기 때문에 순종의 장례식에는 일본식 장례식의 비중을 줄여 진행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의 국장은 6.10 만세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1910년 패망까지 단지 13년의 역사가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국호 대한과 태극기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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