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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88 서울 올림픽 유치전 (역사저널 411)

1980년 대한민국은 격동의 시기를 겪는다. 전두환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후 제 11대 대통령이 된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이 잇따라 발생한다. 전두환은 국민의 이목을 돌릴만한 히든카드가 필요했고 그것이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였다. 그러나 다수의 실무진은 이를 반대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개발도상국으로 국제 스포츠 대회 유치 경험도 많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나라는 전쟁을 치른지 불과 30년이었고 서양 강대국들의 전유물이던 올림픽을 당시 개발도상국(1980년 1인당 국민소득 1699달)에 불과한 대한민국이 1988년 대한민국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88 서울 올림픽은 종합성적 4위로 우리에게 대성공을 이룬 국제행사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최지 선정은 나치 정권 이전이었으나 이후에 나치정권이 들어서면서 철저하게 히틀러가 기획했던 베를린올림픽이었다. 치틀러는 이전에는 없던 성대한 올림픽을 만들고자 했다. 베를린 올림픽은 올림픽 최초 생중계에 개.폐막식 퍼포먼스를 최초로 도입했다. 당시 최대 규모로 개최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선전, 그 당시의 산업과 기술력을 과시하는 용도로 이용했다. 베를린 올림픽은 체제홍보의 장으로 활용으로 활용되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 일본의 건재함을 알리는 계기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적자 

1980년 11월 30일 올림픽 유치 의사 공식 통보-> 1981년 2월 26일 정식유치 신청 제출 

1980년 소련 모스크바 올림픽

1984년 미국 LA 올림픽

 

88 올림픽 유치전 성공은 이것 때문?

잠실종합경기장 1977년 12월 이미 착공

88 올림픽 유치전때 잠실 경기장이 큰 목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잠실 경기장은 88 올림픽때문에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잠실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1977년 12월 이미 남서울 운동장 공사가 시작되었다. 1978년 국제대회를 유치하겠다는 목표로 이름을 서울 종합 경기장으로 바꾼다. 

 

사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려고 했으나 돈이 없어서 반납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이에 대한 아쉬움이 컸고 강남개발을 하면서 당시 잠실 일대에 대규모의 체육시설 건설을 했고 이것이 일본의 나고야와 서울의 88 올림픽 유치에서 큰 차이를 보여주며 서울이 유치전에 성공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고야에서 몬트리올 올림픽 적자로 인해 개최 반대 의견이 나왔다. 올림픽 기반 시설 설립으로 환경파괴 우려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88서울올림픽 유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88 올림픽 준비과정에서 급속하게 개발이 진행되었고 누군가의 삶의 터전을 빼앗기도 했고 올림픽 유치라는 국가적 이벤트를 위해 노력하고 고생하고 희생한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88 서울 올림픽이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과 의의

88 서울 올림픽 최초 기획자 88 올림픽을 처음으로 기획했던 사람은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을 하다가 물러난 상태의 박종규로 사격 협회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1978년 서울 세계 사격 선수권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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