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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효명세자 개혁정치 : 실제모습은?

효명세자는 순조의 아들이다. 순조는 정조의 아들이다. 정조가 일찍 사망하면서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이때는 세도정권이 만들어지던 혼란한 시기였고 정조가 건강이 안 좋아졌을 때 순조의 외척 세력 안동김씨 김조순에게 아들 순조를 부탁한다.  

 

 

적장자 효명세자 

그리고 어린 순조를 대신해 정치를 한다는 명분으로 김조순은 자신의 딸을 순조와 결혼시켰고 외척으로서 안동 김씨 세력을 확장했다. 그렇게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순조의 집권내내 권력을 휘둘렸던 안동 김씨 세력에 힘을 쓰지 못했던 순조였다. 그런 순조의 아들로 태어난 이가 효명세자이다. 효명세자는 적장자(정식왕비가 낳은 아들) 로 태어났기 때문에 굉장히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숙종 이후로 150년 만의 적장자였다.

 

효명 시호

 

 

효명세자의 실제 외모 

현재 효명세자의 어진은 불타버렸다. 한국전쟁때 궁중 유물들을 피난 수도 부산시 동광동의 한 창고에 보관을 하였는데 1954년 12월 인근 판자촌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동광동 창고까지 옮겨붙어 총 4000여 점중 국보급 유물 3400여 점이 소실되었고 그 중에 어진 7점이 남게 되었는데  효명세자의 어진이 바로 이것이다. 

이 모습은 효명세자 18세 때 모습을 그린 어진으로 대리청정 직전이다. 

 

정통성을 가진 효명을 실록 나이 4세때 왕세자로 책봉한다. 효명세자는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무기력한 왕권을 회복시킬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조의 기대도 있었다.  

 

 

 

효명세자가 그린 왕세자입학도첩 그림..

효명세자는 예술과 학식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가 직접 그린 에는 성균관 입학식 과정이 상세히 담겨있다. 왕세자만을 위한 입학례를 그린 6개의 그림으로 입학례 국가적 경사를 기념사진처

jangane.tistory.com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던 효명세자는 학문과 인덕을 두루 갖춘 어진 국왕이 되고자 열심히 노력하며 장성했다. 1819년 11살의 효명세자는 12살의 신정왕후(풍양 조씨)와 가례를 올린다. 그 사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극심해졌고 순조는 자신의 뜻을 펼치기 어려웠다. 1813년부터 순조의 건강이 약화되어갔고 정치적 한계 마져 절감했던 순조는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을 통해 국면전환을 꿈궜다. 그래서 1827년 순조를 대신해 효명세자 19세때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효명세자의 개혁 정책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기간동안 크고 작은 연회를 총 11번을 열었는데 부왕 순조와 어머니 순원왕후를 위한 잔치였다. 그는 궁중무용 창작을 통해서도 왕실 잔치를 열어 왕실의 권위와 위험을 보여주었다. 현존하는 정재(궁중무용) 53가지 중 26가지가 효명세자 작품이다. 

 

잔치에 참석한 대신들은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서약하고 만수무강을 비는 치사를 낭독하게 된다 . 잔치를 통해 군신의 질서를 다시한번 보게 된다.
춘앵무 효명세자가 창작한 춤 현존하는 정재 중 유일한 독무 춘앵무는 효명세자 20세때 순원왕후 어머니의 40세 생일을 기념해 만든 춤이다. 노래 가사, 글 모두 효명세자가 쓴것이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며 50여 차례 과거 실시, 인재 등용, 세도정치를 타파할 군주로 기대받았던 군주이다. 그는 또한 친위세력을 키우기 시작한다.  외척 안동김씨 정권 장악을 견제하기 위해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 선혜청의 요직을 장악한다. 소외되었던 남인, 북인, 소론 계열을 사헌부, 사간원 양사에 집중 배치시켜 외척 안동김씨의 부정부패를 상소하게큼 장치를 한 것이다.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유명무실해진 과거제의 폐단을 시정하도록 했고 왕실 권위 회복을 위해 경복궁 중건 계획을 한다. 

 

효명세자의 죽음 

그러나 1830년 갑자기 각혈을 하던 효명세자는 10여 일후 대리청정 3년 3개월 만에 갑자기 숨을 거둔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 신정왕후는 4세 세손과 단 둘이 남게 된다. 그로부터 4년 후 효명세자의 아버지 순조마저 세상을 떠났고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8살의 세손 조선 24대 왕 헌종이었다. 어린왕의 수렴청정을 대신한 이는 어머니 신정왕후가 아닌 안동김씨 할머니 순원왕후였다.  효명세자가 세자의 신분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어머니 신정왕후는 바로 왕대비가 될수는 없었다. 이후 헌종이 즉위 하면서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존하여 어머니도 왕후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