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학교에 카자흐스탄 공동묘지에 시신을 찾아달라는 전화가 온다. 며칠 후 유해 발굴단이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후 시신이 묻힌 곳을 파기 시작한다. 흙을 퍼내고 또 퍼내고 3일째 되는 날 비밀이 보였다. 비닐에 싸인 유골이었다. 유골의 주인공은 홍범도이다.
홍범도의 분노
1895년 10월 8일 새벽 한양에서 가장 경비가 삼엄한 곳에 남자들이 때로 들어온다. 그리고 여우사냥을 한다고 하고 자객들은 경복궁에 있던 황후를 찾아 죽이고 시신을 찾지 못하게 태워버리기까지 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자객들은 칼집에 '일순전광자노호'라고 새겨놓았다. 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었다는 뜻이다.
전 국민은 피가 거꾸로 솓았고 그중의 한 사람이 바로 홍범도였다. 일명 홍 대장 당시 나이는 27살로 호랑이 사냥꾼이었다. 그중에서도 홍범도는 톱클래스 수준의 포수였다. 홍범도는 체격도 좋았다. 키가 190CM 이상이었다. 당시 남자들 평균 키가 160 정도였으니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 이후 홍범도는 왜놈을 잡기로 결심한다.
산포수 의병대 조직
마음 맞는 포수 몇 명과 산으로 들어갔다. 홍 대장의 두 아들도 아버지를 따라나섰고 이렇게 모인 포수가 68명이었다. 포수들을 조직해 산포수 의병대를 만들었다. 산포수 의병대의 활동무대는 백두산이었다.
함경도 전체가 모두 활동 무대였다. 1년 동안 치른 전투가 무려 60번이었고 전적은 60전 60승으로 의병계의 불패신화를 썼다. 홍범도는 호랑이 사냥을 하듯이 왜놈을 잡았다. 호랑이를 몰이꾼들이 몰아 사정권에 들어오면 호랑이를 잡는 것이었다. 당시 사용했던 총은 화승총이었는데 이 총은 불을 붙여 사용했기 때문에 기회는 단 한 번 뿐이었다. 의병대는 홍범도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으나 의병대는 신출귀몰이었다.
홍범도 대한독립군 이끌다.
그래서 일본군은 홍범도의 집에 들이닥쳐 가족들을 데려가서 고문을 했고 아내는 고문에 실토할까 혀를 깨물고 자결했다. 그리고 홍범도의 큰아들도 전투 중에 전사했다. 일본군의 추적은 더 집요해졌고 이에 홍범도는 만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고 만주에서도 만세운동은 뜨거웠다. 홍범도는 대한독립군을 이끌고 있었고 이때 홍범도의 나이는 쉰둘이었다. 그리고 국경 근처로 독립군 부대가 총집결했다.
봉오동의 특이한 지형
1920년 6월 4일 새벽 두만강 국경 근처 일본군 초소를 기습 공격했다. 우리는 일본군을 유인해 두만강 끝자락까지 왔다. 일본군의 월강 추격대는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이 주둔하고 있는 봉오동에 다다른다. 봉오동의 위치는 두만강 끝자락에 있다. 입구에 기다란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를 따라 안으로 들어오면 높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지형이었다.
봉오동 전투
독립군 700명은 분지지형에 숨어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을 분지지형까지 유인한 후 삼면에서 공격을 했고 이에 정신 못 차리는 일본군이었다. 그러나 독립군의 총알이 떨어져 갈 무렵 일본군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고 이러다가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소낙비와 안개가 산전체를 덮었고 엄지손가락만 한 우박이 떨어졌고 이에 일본군은 후퇴를 했고 독립군은 대승했다.
적군의 사망자가 157명. 중상자 200여 명, 경상자 100여 명, 아군의 사망자 장교 1인, 병사 3인 중상자 2인이며 아군은 안전지로 퇴각하고 적은 패잔 군을 수습하여 다음날에 도강하여 패퇴하였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과 일본군이 제대로 맞붙은 첫 전투였다.
청산리 전투
일본은 피의 복수를 계획하고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화 계획을 한다. 불령선인은 우리의 독립운동가를 가리치는 말로 간도에 있는 독립군을 모조리 없애겠다는 뜻이었다. 새로 소집된 2만 5천 명의 일본군이었고 이에 반해 우리 독립군은 2천여 명정도였다. 1/10로 되지 않았다. 이에 우리 독립군은 주둔지를 봉오동에서 청산리로 옮겼다.
청산리 대첩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김좌진이다. 이 일대는 1000M가 넘는 산악지대로 매복하기 좋고 지형을 이용하면 승산이 있었다. 첫 전투는 청산리 아래 백운평에서 시작되었다.
백운평 전투는 김좌진 장군이 이끌었고 일본군에 맞서 승리한다. 두 번째 전투는 완루구였고 이곳에는 홍범도 장군의 부대가 있었다. 홍 대장은 산 정상에서 동태를 살펴보니 남. 북쪽에서 일본군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에 홍범도 부대는 퇴각하고 반대편에서 올라오던 일본군은 자기들끼리 총을 쏘며 자멸 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청산리 일대에서 6일간 10번의 전투가 벌어지고 10전 10승 전승했다.
인상 깊은 것은 전투 중에도 그 총알이 떨어지는 그곳에 여자들이 주먹밥을 배달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농사지은 돈을 모아 독립자금으로 내어줬고 일본의 감시 속에서 무기 운반 등을 목숨을 걸고 도왔던 것이다.
간도참변
대패한 일본의 분노는 극에 달하며 간도지방의 조선인들을 총으로 , 창으로 보이는 대로 살해했다. 독립군이던 아니던 조선인은 모두 죽인 것이다. 이렇게 무려 3천7백여 명이 죽고 온 마을이 불에 탔다. 이 사건이 간도 참변이다.
봉범도 장군 모든 가족을 잃다.
이즈음에 홍 대장의 둘째 아들도 사망한다. 전투 중 얻은 병환이 악화되어 스물다섯의 나이에 세상을 등진 아들이었다. 이렇게 부인과 두 아들을 떠나보낸 홍범도 대장은 모든 가족을 다 잃었다. 간도 참변으로 독립군들도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홍 대장도 자취를 감췄다.
홍범도 장군 러시아 망명 및 카자흐스탄 이주 왜?
러시아 망명
1년 후 홍범도 대장이 러시아 모스크바 극동지역 민족대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 속에 홍범도 장군이 입고 있는 군복은 전부 러시아 군복이다. 간도 참변이 한창일 때 홍범도 대장은 러시아로 피신을 했다. 일본의 핍박으로 만주에 있던 조선인들도 러시아로 망명했다.
홍범도 장군 농부가 되다.
그 사이 러시아가 공산화되고 소련이 건국되었다. 격동의 1922년 소련군 대위로 편입된 홍범도는 소련 공산당에도 가입했다. 그런데 독립국을 지원하기로 한 러시아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홍범도는 군복을 벗고 농부가 된다. 황무지를 개간에서 논밭을 만들었다. 일본의 핍박을 피해 러시아로 이주한 고려인은 고생 끝에 척박한 땅을 농지로 만들었고 그렇게 농사꾼으로 15년이 지나 예순아홉의 나이가 된 홍범도는 생활이 안정되어 갔다.
고려인 카자흐스탄 강제 이주
1937년에 고려인을 태울 기차가 올 것이고 한 명도 빠짐없이 기차를 타라고 한다. 그리고 기차를 타지 않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 열차의 환경은 너무 열악했고 기차 안에서 사망한 사람만도 500명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이 기차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작으로 카자흐스탄까지 이동거리만 6000km였다.
카자흐스탄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고 이렇게 강제 이주된 고려인은 무려 17만 명이었다. 조선인을 강제 이주시킨 이유는 일본인과 닮았다는 것이다. 일본인과 닮은 사람들 중 일본인 첩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아예 멀리 이주시켜버리자는 것이었다.
홍범도 장군 죽음 그리고 유해 송환
그리고 우리 민족은 다시 그 황무지를 다시 농지로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부부가 홍범도 대장을 찾아와 고려인들을 위한 극장을 만들었는데 그곳의 수위를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홍 대장도 흔쾌히 수락하고 홍 대장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기 위해 부부는 홍 대장의 이야기를 옮겨 적었다. 그것이 바로 홍범도 일지이다.
일지를 토대로 <의병들> 연극을 상연했다. 홍범도 장군도 극장 구석에서 연극을 봤다고 한다. 얼마 후 홍범도 장군은 75세를 일기로 10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광복을 2년 남기고 떠났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
홍범도 대장은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이 유언은 번번이 무산되었다. 이유는 사회주의에 대한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반공주의,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홍범도 장군에 대한 관심을 덜게 했고 소련 공산당에 가입을 하니 공산주의자로 인식되어 늦게 부각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미뤄지다가 2021년이 돼서야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송환되었다. 78년 만의 영웅의 귀환이었다. 정부는 최고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이 사진은 영국인 기자가 찍은 실제 의병들의 사진이다. 옷도 무기도 허름한 모습. 사진 찍는 기사에게 의병들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어차피 죽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값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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