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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혜화문 역사 : 혜화동이 연극의 중심이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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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뜻 

성북구는 '성곽의 북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지역으로,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곳이다. 굽이진 역사를 함께해 온 이 지역의 여러 명소들을 살펴보자.

 

혜화문은 서울 성곽의 4대 소문 중 하나였다. 북쪽에 있던 숙정문이 통행을 금지하자, 대신 북쪽으로 가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다른 문과는 달리 새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봉황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다가 복원되었다.

 

 

혜화문(惠化門) 역사 

혜화문은 한양도성의 4소문(小門) 중 하나이다. 그 이름은 "은혜를 널리 베푼다"라는 뜻이며, 흔히 동소문(東小門)이라고 불렸다.

  • 역사와 이름: 1396년(태조 5년)에 처음 세워졌을 때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 그러나 1511년(중종 6년)에 창경궁의 정문 이름과 같아 혼동을 피하기 위해 혜화문으로 바뀌었다.
  • 북쪽 관문 역할: 한양도성의 정식 북문인 숙정문이 풍수지리적 이유 등으로 평소에는 닫혀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북문의 역할을 하며 여진족 사신이나 동북방면의 사람들이 도성으로 들어오는 주요 관문이었다  또한 양주, 포천 등 한양의 동북부 지역으로 향하는 주요 관문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다른 소문보다 중요한 대문(大門)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 독특한 봉황 그림: 혜화문은 홍예(아치) 안쪽 천장에 다른 대문들과 달리 용이 아닌 봉황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서울의 다른 주요 대문들에 용 그림이 있는 것과는 매우 독특한 차이점이다. 이것은 조상들의 실용적이고 재치있는 선택이었다. 문 밖 지역에 복숭아나무가 많아 새들이 몰려와 농사에 피해를 입히자, 새들의 왕인 봉황을 그려 넣어 새들을 쫓아내고 농작물을 보호하려 한 것이다.

 

 

  • 수난과 복원: 임진왜란으로 문루(門樓)가 소실되었다가 1744년(영조 20년)에 복원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문루가 철거되었고, 1939년에는 전차길을 내기 위해 홍예(석문)마저 헐렸다. 1994년에 복원이 이루어졌는데, 원래 자리가 도로가 되어버려 본래 위치보다 약간 북쪽에 새로 세워졌다.

 

 

혜화동이 연극의 중심이 된 이유 

조선시대 혜화동 일대는 성균관과 창경궁이 인접해 있어 중요한 지역이었지만, 본격적인 주거지로 개발되지는 않았다. 주로 성곽 주변의 군사적 기능과 성균관 유생들을 위한 공간이 주를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와 근대: 변화의 시작

일제강점기는 혜화동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28년 일제는 도시계획을 명분으로 혜화문 문루를 철거했고, 1939년에는 석문마저 파괴하여 도로를 확장했다. 이로써 500년 넘게 자리를 지키던 혜화문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 시기 혜화동에는 근대 교육 기관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교 (현 서울대학교 )가 설립되었고, 이로 인해 혜화동은 점차 대학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또한, 혜화동 성당(1927년 설립)과 같은 근대 건축물들이 세워지며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서울대학교 이전과 공간의 탄생

원래 대학로 지역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과 법과대학이 위치한 한국 지성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종합 이전하면서 캠퍼스 부지가 비게 되었다. 이 넓은 공간은 대학로가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문화예술 중심지로의 변화

서울대학교가 떠난 자리에 정부는 공원을 조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마로니에 공원이다. 이후 1979년, 박정희 정부는 이 일대를 '문화예술의 거리'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 계획의 핵심으로 공원 부지 안에 **문예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now the Korea Arts and Culture Commission) ) 청사와 미술회관, 연극 공연장(현 아르코예술극장)**을 지었다.

 

소극장 밀집의 시작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명동은 한국 문화예술의 심장부였다. 당시 명동에는 국립극장(현재 명동예술극장 자리)을 비롯해 상업 연극과 실험적인 연극을 올리는 여러 극장 및 다방이 밀집해 있었다. 정부 주도로 대규모 문화예술 기반 시설이 혜화동에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연극인들이 대학로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시 명동, 신촌등 다른 지역에 흩어져 있던 민간 소극장들이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대학로는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저렴하고, 이미 문화예술의 중심지라는 상징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1년 '샘터 파랑새극장'을 시작으로 여러 소극장들이 대학로에 둥지를 틀었다. 이는 연극인들에게 안정적인 창작 공간을 제공했고, 관객들은 한곳에서 다양한 연극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문화 기반 시설 조성 → 연극인들의 유입 → 소극장 밀집' 이라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대학로는 오늘날 대한민국 연극의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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