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고려청자
2007년 5월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고려시대 유물이 무더기로 발굴된다. 58살 어부 김용철이 바다에 던진 주꾸미 통발에 주꾸미 한 마리가 걸려 올려졌다. 그런데 그 주꾸미의 빨판에 파란색 대접하나가 딸려온 것이다.
무려 12세기의 2만 점이 넘는 고려청자를 싣고 가던 보물선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역사상 가장 많은 고려청자가 한꺼번에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고려청자만큼이나 관심의 대상이였던 것은 목간이었다. 이 목간에는 탐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탐진은 강진의 옛 이름이다. 이 배는 탐진에서 출발해 고려 수도 개경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이 목간 덕분에 강진산 고려청자의 명성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강진은 청자 생산에 알맞은 조건인 품질 좋은 흙과 풍부한 뗄감 그리고 강진만을 끼고 있어 원활한 물자수송에 가능해서 강진이 청자 생산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고려청자박물관
고려청자 박물관 안에는 청자 장인 이용희 씨의 집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집 주변으로 박물관이 들어 선 것이다. 그는 1964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자신의 집 앞마당을 발굴 작업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청자에 관심을 갖고 청자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발굴 첫날 발견된 것이 양이정 정자의 기와였다. 첫 삽을 딱 파는 순간 청자기와가 발견된 것이다.
고려 18대 왕 의종은 사치의 극을 달리던 왕으로 양이정이라는 정자를 청자 기와로 지었다는 문헌은 있는데 강진에서 생산해서 올려 보냈다는 근거가 없었다. 그런데 강진 대구면에서 청자 양각 모란당초문 기와가 발견되면서 기록에만 있던 내용이 입증되면서 강진은 고려청자의 본향이 된다.
고려청자 특징
12, 13세기 청자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중국의 송과 고려 두 나라 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려청자의 품질은 자기의 종주국인 송나라도 인정했다. 고려청자는 고려 시대의 예술을 대표하는 공예품으로 비취색, 비색으로 유명하다. 철 성분이 포함된 유약을 발라 1300 도 고열에 구우면 청록색 자기가 탄생한다.
고려청자는 12세기 후반 상감기법으로 최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상감은 금속공예에 쓰이는 기법인데 이 기법은 고려가 도자기에 응용해서 만든 독자적인 기술이다.
이후 조선시대로 오면서 조선 정부는 백자 제작에 힘을 쓴다. 그리고 다른 그릇의 제작은 금지시켰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3년 어느 날 강진 대구면에 숱하게 존재했던 청자 도요지가 일본인 손에 의해서 발굴이 된다. 고종의 비 엄씨의 토지 관리인으로 일하던 일본인이 파란 사금파리를 줍게 되고 이듬해 1914년 이왕직박물관에서 현지조사를 시행한 후 100군데가 넘는 고려청자 도요지를 찾아낸다.
다시 한번 일본인들 사이에 고려청자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서울에 있는 일본인 골동품 상에서 가게에 있는 청자를 모두 사갔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인들 사이에서 일본인들이 파란 그릇을 사간다는 말을 듣고 겨우 막거리 값에 팔아넘겼던 경우가 많았다. 당시 조선인들은 그것의 가치를 몰랐다. 당시 개성에 있는 고려왕릉 주변은 일본 도굴군들에 의해 도굴당해 벌집처럼 구멍이 났다.
1939년 조선총독부는 강진땅 약 60만 제곱미터(18만 평)을 고적 107호로 보존한다. 강진에 찾아낸 188개 소의 청자 도요지 중 100여 개소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됐다. 광복 후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도 본격적으로 발굴을 시작했고 이용희 청자 장인의 논이 있던 자리에서 사당리 41호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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