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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조귀인 인조가 가장 아낀 후궁

인조는 44살에 얻은 효명옹주를 애지중지했다. 인조는 효명 옹주를 아낀데는 이유가 있었다. 효명옹주 탄생  1년 전 1636년 병자호란이 있었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심지어 아들 셋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야 했던 인조였다.  27년을 함께 살았던 인열왕후도 전쟁 1년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을 겪고 태어난 효명옹주였다.  이런 효명옹주를 낳은 사람이 조귀인이었다.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jtbc) 속 조귀인역 김현주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jtbc) 속 조귀인

 

 

 조귀인은 효명옹주를 낳기 전까지는 종4품의 숙원이었으나 딸을 낳고 정식 후궁이 된 조귀인이다. 조선 16대 왕 인조의 후궁 조귀인은 인조가 생애에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후궁이다. 

 

내명부 품계표
내명부 품계표

 

 

 

조귀인은 누구? 

 

조귀인은 효명옹주를 낳을 당시 일개 후궁이었다.  조귀인의 입궁시기는 1630년으로 인조 즉위 8년째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조는 조귀인을 눈여겨 보고 호감을 느꼈으나 신하들을 그다지 조귀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조귀인은 경상북도 병마절도사 아버지가 있었으나 어머니는 첩이었고 정백창이 조귀인을 인조에게 바쳤고 정식절차를 밟고 들어오지 않은 낙하산 궁녀였다.  
 

 

조귀인 정3품 소용되다

조귀인은 이렇게 집안배경도 없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믿을 수 있었던 사람은 오직 인조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인조는 중전을 뽑게 되었고 그렇게 15세의 장렬왕후가 45세의 인조의 계비로 들어온다. 그리고 조귀인은 또다시 임신을 했다. 그러나 인조가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고 인조는 자신이 아픈 것이 저주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 한 장면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 한 장면



인조는 이에 대대적으로 수색으로 하고 자신의 처소 14곳 조귀인의 아이가 때어날 원손이 지날 장소 12곳에서도 저주물이 발견된 것이다. 이 저주물을 발견한 사람은 조귀인이었기 때문에 인조는 조귀인에게 의지하게 된다. 그리고 조귀인은 아들을 낳고 정3품 소용이 된다.  

 

이후 다른 후궁이 인조의 승은을 받게되지만 얼마후 조귀인은 목숨에 위협을 느끼는 저주를 받게 되고 이를 승은 상궁 이씨가 했다고 자백을 하니 인조는 이씨를 유배를 보낸후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이것은 조귀인이 자작극을 꾸며 승은 상궁 이씨를 모함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데 이외에도 조귀인에 대한 또 다른 소문이 돌았다. 조귀인으로 인해 인조와 중전이 별거한다는 소문이었다. 15세에 궁에 들어온 장렬왕후는 7년이란 시간동안 인조와 왕래가 거의 없었다.  

 
소현세자 사망
1645년 인조의 맞아들 소현세자부부가 돌아오게 되고 다를 인조는 반기지 않았다. 청나라에서 소현세자를 왕으로 교체하려한다는 소문과 함께 조귀인에게 소현세자의 부인 강씨가 역모를 꾸민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결국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미움이 증오로 바뀌게 되고 세자가 돌아온지 얼마지나서 소현세자는 말라리아 진단을 받고 앓다가 사망하게 된다.

 

 

아버지 인조의 미움만 받다가 급사한 것이다. 남겨진 강씨의 심정은 너무 답답했고 애란이라는 궁녀를 시켜서 왜 이런일이 일어났는지 무당에게  다녀오라고 했다.  무당은 소현세자가 입고 있던 옷을 처리하라고 했고 이를 애란이 처리하고 있는데 조귀인이 방으로 들어와 도와주겠다고 하고는 갑자기 그 앞에서 쓰러졌다. 이 소식은 다시 인조에게 들어가게 되고 인조는 강씨가 자신에게 저주를 했다고 분노했다. 그러나 이것도 조귀인의 자작극이었다. 

 

조귀인 정2품 숙의 되다
조귀인은 세자빈 강씨가 인조를 저주한것 처럼 꾸민것이었다. 세자빈을 제거하려는 인조의 의중을 꿰뚫고 있었던 조귀인은 일을 꾸며서 인조가 세자빈 강씨를 처벌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줬던 것이다.  그 후 몇개월 후 조귀인의 입지는 올라가게 되고 품계 정 2품  숙의가 된다. 그리고 인조가 장렬왕후를 건강이 안좋으니 건강관리를 위해 지금의 경희궁 (경덕궁)으로 옮겨 살게 한 것이다.  

 
세자빈 강씨 사약 
조선 최초 왕과 왕비가 별거하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러던 1646년 1월  인조가 먹을 전복에 독이 발견되면서 다시한번 인조를 불안에 빠지게 했고 인조는 배후로 의심되는 사람으로 세자빈 강씨를 지목했다. 명확한 증거도 자백도 없었다. 그래서 인조는 결국 세자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린다..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 한 장면

 

종1품 귀인되다.

 

1647년 8월 조귀인의 딸 효명옹주가 혼례를 하게 되고 당시 인조반정의 1등 공신 영의정 김자점의 손자과 혼례를 올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조귀인은 내명부의 실세가 된다.  그리고 조귀인은 종1품 귀인이 된다. 첩의 딸로 태어나서 궁녀로 시작해 19년만에 오른 귀인의 자리였다.

 

인조 사망

그러나 귀인 책봉 3개월만에 인조가 5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 효종이 왕에 즉위한다. 왕이 죽으면 후궁은 궁을 떠나야 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또한 쫓겨났던 장렬왕후는 다시 궁으로 돌아왔고 효종의 어머니로써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된 것이다. 조귀인과 장렬왕후의 처지가 뒤바뀐 것이다.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 한 장면

 

이에 조귀인은 암암리에 왕실 최고 어른 장렬왕후를 저주한 것이다. 이에 장렬왕후는 조귀인의 여종을 매질하고 인조가 죽은 후 무속신앙과 불교에 심취해 있던 조귀인의 행동을 장렬왕후는 효종에게 알리게 된다.  인조의 3년 상이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사적으로 불공을 들이거나 무당을 들이는 행동은 유교예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효종은 조귀인의 측근은 잡아 국문을 하게되고 이에 엽기적인 저주행위가 드러난다.  

 

효종실록에 실린 조귀인의 계략
효종실록에 실린 조귀인의 계략

조귀인의 저주사건이 있은 후 15일 뒤 김자점의 아들이 충격적인 자백을 한다. 조귀인은 자신의 첫째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자신의 딸 효명옹주와 저주를 했고 김자점 일가는 이를 돕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효종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국 1651년 12월 14일 효종은 조귀인에게 사약을 내린다.

 

 

궁녀로 입궁한 조귀인은 21년 궁녀의 삶을 마쳤다. 조귀인은 저주를 이용해 권력을 얻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 저주때문에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