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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장릉 (단종의 묘) 이야기

조선왕릉 중 도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왕릉은 강원도 영월의 단종 장릉이다.  당시 단종의 시신을 누구도 수습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영월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 

 

세조가 왕권을 찬탈한 후 단종이 상황으로 물러나게 되니 단종복위운동이 1456년 일어나고 이것을 세조가 알게 되면서 거사는 실패로 돌아간다. 이때 세조는 사육신의 멸문지화를 명령하게 되고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가족) 의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바다에 버렸다. 무덤을 만들때 가장 금기하는 것이 물이 흐르는 곳이다. 이것은 세조의 분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마저도 모반에 가담 사약을 내렸다.

 

 

 

단종 사후 240년후 단종의 능에 큰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 현재 단종의 능(장릉)은 강원도 영월에 위치해 있다.  

 

 

단종은 어떻게 죽었나? 

 

1457년 세조 3년 단종 17세의 나이로 영월 청령포에서 죽음을 맞이한 단종이나 단종의 죽음은 세조실록에는 단종이 자결을 하였다고 되어있다. 다른 기록에는 세조가 단종에게 사약을 보낸 기록도 있다. 왕방연이라는 금부도사의 아픔을 노래한 시조도 전해지고 있다. 어떤 이유든 단종의 죽음은 세조가 계획한 것이다.

 

단종의 시신을 누구 수습했나? 

왕명에 의한 죽음이었기 때문에 단종의 시신 수습도 불가능했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멸문지화를 당할수 있는 일이었다. 이때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영월 엄씨 (산악인 엄홍길 조상) 엄흥도가 수습을 하게 된다.  

 

어느 눈오는 밤 엄흥도는 남몰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땅을 찾아 다녔다. 한 겨울이라 땅이  얼어있어서 시신을 묻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마침 사슴 한마리가 앉아 있다가 일어났고 그 자리에 단종의 시신을 안치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신을 안치한 후 엄홍도는 족보도 없애고 가족과 함께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났다. 이들은 경상남도 울주 금곡마을에서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1698년 단종과 사육신들 복권되면서 단종의 능도 왕릉으로 격상된다. 이때 엄흥도의 충의를 기른 정려각도 1726년 설치가 된다.  가문의 공을 인정받아 군역, 잡역을 면제받게 된 영월 엄씨 가문이다. 1748년에는 영월 엄씨 족보도 편찬하게 된다.  

 

 

장릉의 특이한 점 

장릉의 특이한 점은 단종의 왕릉인데 단종에게 충절을 바친 인물들의 제사도 함께 진행한다.  왕릉에는 단종에게 충절을 바친 신하들을 기리기 위해 설치한 3개의 제단이 있다. 그 중에 정단에는 충신 32명 (엄흥도 포함) 을 위한 제단이고 세 개의 작은 단은 관리, 환관, 맹인, 궁녀 등 총 268명의 제사를 함께 지내는 단종의 능이다. 왕릉 중 유일한 방식의 배식단이다.  

 

 

단종 비의 묘 사릉

단종이 복권되면서 단종의  , 정순왕후도 묘에서 능으로 격상된다이때 지은 능호가 사릉이다단종을 생각하고 사모한다는 뜻의 생각할 사를 사용해 사릉으로 지었다조선왕릉에서 남편과 부인이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부의 능이 단종 장릉과 정순왕후 사릉이다.

 

정령송

 

 이에 1999년 정순왕후 능의 소나무를 단종 장릉에 한그루를 심었다. 이 나무가 정신과 영혼이 남아있는 나무라는 뜻의 정령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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