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7월 영국 세인트폴 성당에서 열린 영국 왕실의 결혼식이 전 세계 50여 개국에 생중계되는 그야말로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이날의 주인공은 영국 왕실의 서열 2 위 찰스 윈저 왕세자와 13살 차이 나는 이제 막 20 살이 된 유치원 보조교사 출신의 다이애나 스펜서였다. 이날의 결혼식은 슬픈 동화의 시작이었다.
다이애나 비는 누구인가?
우리가 알기로는 다이애나는 유치원 보조 교사로 일했다고 알고 있으나 실제로 다이애나 집안은 귀족 가문 출신이다. 다이애나의 성이 스펜서인데 Spencer 가문은 중세까지 올라가서 유서 깊은 가문이다. 영국 내전때 목숨을 잃었던 스튜어트 왕가였고 유명한 사람으로는 윈스턴 처칠의 조상과도 관련이 있다. 다이애나의 어린시절때는 왕실 땅과 인접해 있었던 스펜서 가문의 영지였다. 그래서 찰스 왕세자의 동생들과 다이애나는 친구였다.
찰스 왕세자는 처음에는 다이애나 언니와 만났었다. 사실 찰스 왕세자는 당시 20명 이상의 여자와 데이트를 했었다. 또한 당시 찰스는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지식인이었던 반면 다이애나는 공부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인지 중등교육이수자격시험에서 낙방했었다. 이 시절은 대학을 많이 가던 시절이 아니었다. 지금도 영국사회는 대학 진학률이 50%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학에 가지 않는 것이 흠이 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다이애나 인기투표
다이애나가 영국 왕실에 들어오고 3년이 지나 18세 이상 영국 성인 천명에게 조사한 인기투표 결과이다.
1983년 호주를 방문했던 다이애나 비의 인기는 아이돌의 인기와 같았다. 아이들이 다이애나 비에게 꽃을 주기위해 몇 시간씩 기다리기도 했다.
10년이 지난 뒤 인기투표 조사 결과
다이애나는 기존의 영국 왕실이 보여주지 못했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아들의 운동회에서 맨발로 달리기를 하기도 하고 잡지 인터뷰 사진에 실리기도 하고 백악관에서 존 트라볼트와 춤을 추기도 했다.
다이애나 비 패션
또한 다이애나 비의 패션도 주목을 받았는데 그녀는 80, 90년대의 패션아이콘이었다. 특히 T.P.O (시간, 장소, 상황)에 맞게 전략적으로 잘 이용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이애나는 블레이저, 맨투맨 등 따라 입기 쉬운 아이템을 감각적으로 매치하면서 왕실 구성원으로 품위까지 놓치지 않았다.
왕실 구성원으로 정착 품위와 패션 센스를 함께 보여준 시기로 나라를 대표하는 동시에 타국의 문화를 존중하는 의상을 착용했다.
찰스 왕세자의 불륜, 이혼
결혼 전 찰스 왕세자의 첫사랑 카밀라가 있었다. 그러나 카밀라가 찰스 왕세자의 정적이라고 할수 있는 앤드류 파커 볼스와 결혼을 했고 그래도 찰스는 카밀라를 잊지 못했다.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 규정에는 결혼한 여성 이혼을 했더라도 배우자가 살아있는 경우는 재혼을 금지했다. 유부녀였던 카밀라와는 성공회 예식에 따라 결혼이 불가했었고 윈저 가문은 상당히 보수적이여서 왕세자비가 될 사람은 반드시 처녀여야만 했다.
결혼 전부터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는 연인 사이였다. 그러나 찰스 왕세자가 입대하면서 이별을 했다. 결혼 이후 카밀라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불륜 관계를 지속했다. 사실 카밀라는 왕세자 부부의 결혼식에도 참석했었다.
결국 1996년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비는 이혼을 한다. 그리고 찰스 왕세자가 불륜을 시인하는 날 다이애나가 이 드레스를 입었다.
이혼 후 다이애나 비는 자유로운 삶을 누렸다. 다이애나 비는 사람들이 꺼리고 편견을 깨는 일을 많이 했다. 1987년 다이애나 비와 에이즈 환자의 만남을 담은 사진이다. 이때는 사람들이 에이즈를 굉장히 무서워할때였고 특히 성소수자들이 많은 비난을 받았을 때이다. 살짝 닿기만 해도 에이즈가 옮는다는 편견이 널리 퍼져있던 상황이었다.
이때 다이애나 비가 에이즈 환자를 만나 맨손으로 악수를 했고 이것이 생중계되면서 사람들에게 에이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하고 인도 네발등의 병원을 방문하며 한센병, 나병환자에 대한 선입견을 깨는 것에 큰 역할을 했던 다이애나 비이다. 사람들이 꺼리는 일에 발 벗고 나섰던 착하지만 용감했던 인물이었다.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대인지뢰를 금지하는 운동에도 참여했다. 직접 지뢰밭에 들어가는 등 대인지뢰의 비인도적 측면을 고발, 1997년 대인지뢰전면금지협정이 체결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고 이 운동을 이끌었던 단체는 노벨평화상을 수상을 받는다.
다이애나 시련 (폭식증, 자살시도)
이런 활동을 하는 사이에 다이애나는 폭식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음식을 먹고 토하는 증상이었고 이런 와중에 찰스 왕세자는 본격적으로 불륜을 저지른다. 고통이 극에 달아 심지어 자살도 시도했었다.
다이애나의 이혼
1992년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을 출판하면서 왕실의 민낯이 드러나는 일벌어졌고 책 발간 이후 공식적으로 별거를 시작했다.
왕세자 부부 마지막 공식 나들이 장소
왕세자 부부의 마지막 공식 나들이 장소는 1883년 한영 우호 통상조약체결 후 109년 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영국 왕실 가족 방한이었다. 방한 행사동안 공식행사를 제외하고는 따로 일정을 보낸 뒤 돌아갔던 왕세자 부부이다.
1992년 한국 방문이후 1995년 bbc 인터뷰하고 1996년 이혼을 했다. 그리고 1997년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한다.
다이애나의 교통사고 그리고 죽음
이혼 후 연인과 함께 파리에 머무르던 다이애나 비는 남자친구였던 이집트 출신 기업인 도디 알파예드와 프랑스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8월 31일 호텔에서 저녁 시간을 보낸 뒤 12시 19 분경 차에 탑승했고 파파라치들이 무리하게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고 이를 피하기 위해 과속을 하던 다이애나 비의 차량은 지하차도의 기둥에 부딫치며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결국 다이애나 비는 36세의 나이에 목숨을 잃게 된다.
왕실을 나간 후에도 다이애나 비는 여전히 영국인의 마음속에 왕세자비로 남아있던 다이애나의 사망으로 영국인들은 실의에 빠진다. 몇일 동안 궁 앞에 꽃을 놓고 기도하며 다이애나 비를 애도했던 영국인들이었다. 이렇게 엄청난 추모 열기에도 영국 왕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여왕의 최우선순위는 윌리엄, 해리왕자가 언론에 노출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주 분명하게 다이애나 비의 죽음은 전적으로 가족의 사적인 문제이므로 공적인 자리에서 어떤 언급도 대응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조기도 걸지 않았다.
다이애나 죽음에 대한 음모론
이에 다이애나 죽음에 대한 음모론도 있었다. 다이애나 비의 죽음 뒤에는 영국 왕실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이애나가 사귀던 남자친구는 이집트 출신의 이슬람교도였고 이에 영국 왕실은 공포감을 가질수 있다고 생각했고 윌리엄, 해리 왕자에게 이교도의 의붓 형제가 나올 수 있다는 두려움에 교통사고를 위장해서 다이애나를 죽은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이었다.
실제로 다이애나의 아버지가 재판을 걸어 사건조사를 요구했고 결론은 음주운전으로 교통사고로 판명되었다. 80,90년대는 왕실의 지지도가 70% 이상이었으나 다이애나 사망 직후에는 48%까지 하락했다. 그제서야 영국 왕실은 왕실장으로 장례 방식을 변경했다. 이 장례식에 엘리자베스 여왕과 찰스 왕세자도 참여했다.
왕실 존재의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배워나가야 하는 왕실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왕실의 살아남기 위한 왕실의 존재의 의미가 다이애나 비를 통해 알아가고 있다고 볼수 있다. 그래서 현재 영국 왕실은 여론 조사를 실시, 홍보 전문가를 기용하는등 여론 동향을 꾸준히 살피며 전문가로부터 조언을 받고 있다.
찰스 왕자와 카밀라
다이애나 비 사망 8년 후 카밀라와 찰스 왕세자는 2005년 결혼한다. 성공회 규정까지 바꿔가며 결혼 두사람은 결혼한 것이다. 카밀라에게는 콘월 공작 부인이라는 명칭을 내리고 영국 왕실 서열 2위의 여성이 되었다.
그리고 최근 2022년 6월 여론 조사 질문 10년 후에도 군주제가 유지될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41%만 그렇다고 대답했다. 10년 전에는 60%였다. 특히 18~24세 33%만이 군주제가 유지될 것이라고 답변했다. 찰스 왕세자는 많은 나이와 더불어 오랜 시간 쌓아온 비호감 이미지로 인해 상당히 힘들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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