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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정치사회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 무엇이 문제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은 국가 차원에서 인신매매를 묵과하고 있고 한일 양국의 잘못된 합의로 인해 더욱 상처가 깊어졌다. 

 

 

 

위안부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국제적으로 널리 쓰이는 표현은 일본군 성노예 인데 피해자분들은 성노예라는 표현으로 마음의 상처가 더욱 깊어지기 때문에 보편적인 표현은 일본군 '위안부' 이다. 

 

 

 

세계 최초로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한 분은 고 김학순 할머니이다. 일본에서도 80년대 부터 '위안부' 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실제로 피해자들이 나왔던 것은 아니였는데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피해 사실을 알린 것이다. 

 

 

일본군 위안소 시작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인해 당시 일본군의 잔혹한 범죄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처음 일본군의 위안부의 시작은 난징대학살이었다.  1937년 일본은 난징 대학살을 하면서 수많은 중국 여성을 강간한 후 살해했는데 일본은 전쟁터의 강간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위안소를 설치했다는 주장이다. 

 

중일전쟁 속 난징대학살 일본은 왜? (원인,배경)

 

중일전쟁 속 난징대학살 일본은 왜? (원인,배경)

중일전쟁 전 상황 1차 세계대전 (1914년 7월 28일~1918년 11월 11일) 1차 세계 대전 때 독일, 오스트리아 VS 영국, 프랑스, 미국 양분된 진영에 일본이 참여하면서 일본은 태평양의 섬인 남양군도와 중

jangane.tistory.com

 

 

1931년 만주 침략을 위해 수많은 일본 군인이 동원되었고 위안소의 수도 늘어났다. 그로 인해 식민지 여성들을 강제 동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강제적으로 위안부를 데려가려는 업자들이 생겨나고 일본 정부는 이런 인신매매를 눈감아 준다. 

 

 

 

일본의 강제 연행 수법은 군함에 타기 전까지는 좋은 취업처 공장이나 농장에 간다고 속인 후 데려가는데 군함을 타는 순간부터 강제 연행이 이루어진다. 중국 항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 헌병대는 여자들을 내리자마자 위안소로 그대로 데려갔던 것이다. 이 당시는 1925년 일본은 부녀자, 아동 매매 금지 조약에 가입되어 있던 일본이었기 때문에 조약 위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본 정부는 모른척 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신 일본 정부는 '21세 이상 여성만 동원하겠다' 고 했으나 실제로는 14~ 18살까지 어린 소녀들을 강제 동원했다. 

 

성병 검사 결과 문서에 적힌 당시 나이들.

 

위안부 문제 일본 대응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담화 1년 후에 당시 관방장관 가토 고이치는 일본의 입장을 표명했는데 위안소 설치 및 운영은 일본정부가 관여했다 인정했으나 강제성은 부인했다. 

 

가토 담화

 

그 다음으로 1993년 일본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가 발표한 담화를 발표했다. 그의 담화는 강제성도 인정했으나 이는 일본인이 아닌 관헌: 즉 한반도의 군인, 순사, 면 직원 등 한국사람이 직접 가담해 범행을 한 것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고노 담화

 

고노 담화의 발표문은 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2012년 아베 정부 출범과 함께 이마져도 고노담화 백지화를 시도했다. 

 

 

위안부 합의의 문제점 

고노 담화 사문화 시도에 이어 2015년 위안부 문제를 한일 양국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동의도 없이 10억엔 돈을 받고 합의를 했다.  당시 북한 핵문제 해결에 있어 한미일 공조를 위해 지금의 한일 관계는 걸림돌이라고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를 푸쉬하던 상황이었다. 이때 위안부 문제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외교부가 아닌 국정원이 주도했었다. 

 

10억엔의 돈이 배상금으로 얘기했으면 문제가 없었다. 배상금이란 범죄를 인정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 언론과 기자 회견을 한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이 이것은 배상금이 아닌 위로금이라고 명확히 언급한 것이다. 

 

 

 

국고에서 돈을 냈다고 해도 위로금이면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기시다는 이때 일본정부의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했는데 통감이라는 말은 가슴아프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현 정부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반영 안 된 위안부 합의에 대해 전면 재검증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군의 한국인 위안부 학살을 입증할 영상이 공개되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사문서화했다. 

 

위안부 기록문 유네스코 등재 난관 이유  

당시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8개국이 협력해 일본의 만행을 증명할 자료를 모아 위안부 기록물로 등재 요청을 한 상황이었다. 일본은 그것을 막기 위해 위안부 합의를 하면 한국은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빠르게 합의를 했다고 한다. 

 

 

일본이 현재 유네스코에 분담하고 있는 돈이 9%정도 이다. 이는 현재 유네스코에 가장 많은 분담금을 지불하고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 이에 일본은 탈퇴를 무기로 유네스코를 압박하고 있고 현재 미국이 유네스코를 탈퇴해버렸다. 2017년 팔레스타인이 유네스코에 들어왔는데 팔레스타인 이슈를 문제삼아 미국은 유네스코 탈퇴를 결정한 것이다. 

 

일본은 유네스코에 새로운 기준을 많이 요구했다.  2017년 당사자간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제안이 유네스코에서 통과되어 위안부 기록물 등재가 보류된 것이다. 

 

 

 

필리핀에 세워진 위안부 기림 동상으로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중심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렇게 국제적 연대도 조금씩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 

일본 점렴 하에서 학대를 당한 모든 필리핀 여성들을 기억하는 동상

 

위안부 문제는 감정적이 아닌 명확한 논리로 말할 수 있는 태도로 무장하여 일본의 반응에 대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