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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우리나라 조선업 역사 : 현대 울산 조선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 공업화를 결심한다. 조선 산업은 우리 삶과 밀착되어 있다.  모든 수출, 수입품을 실어 나르는 것이 배다. 화물 운송의 대부분 90% 이상이 배를 통해 이루어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조선이다.. 

 

조선업 민간사업된 이유

박정희 대통령 이전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조선공사를 1950년 1월 국영기업으로 출범시킨다. 이승만 대통령은 조선 산업에 관심이 많았다. 이유는 미국은 공군과 해군을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제2차 세계대전 때 퇴역한 배를 사 왔다. 대한조선공사를 만들고 6개월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후 1862년 대한조선공사를 공기업으로 경영하게 되고 이에 일본에 222만 달러의 차관을 요청한다. 그러나 1968년부터 부실기업정리가 실행되었는데 대한조선공사가 대표적인 부실기업이었다. 이에 1970년대 이후 조선 산업은 공기업에서 정부가 보조하는 민간기업이 주도하는 산업으로 전환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입장에서 경제성장을 위해 수출이 필수였고 조선 산업에 기업이 나서야 함을 강조한다. 이때 현대그룹이 나서게 된다. 현대그룹은 현대건설로 시작했기 때문에 조선은 건축과 닮아있어 건설기반의 사업가가 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정주영 회장이 조선산업에 진출한 이유는 미국기업가 헨리 카이저를 벤치마킹했는데 카이저 그룹은 건설업을 시작으로 자동차 조선업으로 진출해서 성공한 회사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전후해서 남북간의 NLL 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한 해이다.  한국전쟁 시기에  제해권을 장악한 UN군으로 인해 북한 앞바다의 서해 5도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북한이 해군을 복원하기 시작했고 1960~70년대 남한의 해군 경비정이 북한에 의해 격침, 나포되는 경우가 생겼다. 1967년 해군 당포함 피격 침몰로 39명이 전사했다. 

이처럼 국방력을 위해서 조선업을 발달시킬 필요가 있었다. 또한 1970년 초 비슷한 시기에 포항제철소가 건설되면서 철강이 생산되고 철강 수요처로 적합한 것이 조선 산업이었다. 원래는 조선 산업을 포항제철이 있는 포항에 지으려 했으나 현대가 사업자로 선정되면서 조선소 위치가 울산으로 옮겨진 것이다. 2005~2008년 조선 산업 호황기를 이룬다. 

 


조선소 건설을 위해 정주영 회장은 무엇을 했나? 

 

당시 조선소 건설을 위해 6300만 달러가 필요했는데 4300만 달러 약 208억 원을 외자로 충당했다. 4300만 달러는 1971년 경제개발 예산의 15%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만큼 조선 산업은 덩치가 큰 산업이었다. 이때 정부가 14%, 현대가 86%를 충당해야 했다.  

 

현대가 담당해야 될 막대한 초기 투자 자금을 구하기 위해 정주영 회장은 해외로 나간다. 이때 사업계획서 1장 , 미포만 백사장 사진 1장 들고 간다. 당시 미국, 일본에 차관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나서 영국 선박회사의 롱바텀 회장을 만나서 추천서를 부탁하기 위해 간다. 

 

조선소 건설 전 미포만 항공사진


500원이 이룬 기적
이때 정주영 회장이 당시 오백원 지폐를 꺼내 들고 뒷면의 이순신 거북선을 보여주며 영국보다 300년 앞선 1500년 대에 철갑선을 만든 민족이라고 말하며 롱버텀 회장의 마음을 움직여 영국 버클레이 은행에 추천서를 받아냈다. 

영국은 해양 대국으로 자부심이 강한 나라인데 영국 해군 사관학교에서도 교육을 하는 최고의 영웅이 바로 넬슨 제독이다.  이런 넬슨 제독과 함께 추앙받는 인물이 바로 이순신이다. 세계 20대 해전 중 하나로 꼽히는 한산도 대첩이다.

 

우리민족은 산업화가 늦어졌을 뿐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호소

선박왕 리바노스 만나다. 
그러나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수출을 지원하는 영국 정부 기구인 수출신용보증국(ECGD)을 통과해야 했다.  이곳의 조건은 배를 살 사람이 있어야 차관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때 정주영 회장은 스코트랜드에 있는 스코트리스코 선박회사에 26만 톤급 배의 도면을 빌려온다. 이것을 가지고 그리스의 선박왕 리바노스라는 사람을 만났다. 이 사람에게  배에 하자가 있으면 원금을 돌려주고, 16% 싸게 해 주겠다는 파격 조건으로 배를 팔아서 계약서를 영국 정부에 들고 가서 차관 승인을 받아냈다. 

선주에게는 리스크가 없는 계약이었다.

그러나  조선소와 배를 만드는 시간은 2년뿐이었다. 조선소를 만들면서 배까지 납품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신발끈을 풀 시간도 없이 일을 했다. 그리고 1974년 6월 조선소와  1974년 7월 26만 톤급 대형 유조선이 탄생을 한다. 당시 노동자들은 월평균 500~600시간을 근무했다.  1973년 한 해 1834건 산업재해가 발생했고 34명이 사망했다. 1974~75년 산업재해가 4000건 가까이 발생한다. 우리나라 조선 산업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뤄낸 결과인 것이다. 

 

현대 울산 조선소

우리나라의 첫번째 배는 애틀랜틱 배런호였고 선주 리바노스는 이 배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배를 만들고 4년 만에 초대형 유조선 10척을 수주하다.  그리고 한국은 조선 산업 10년 만에 세계 조선 1위가 된다. 

 

갑판의 넓임만 해도 축구장 3배, 63빌딩 1.5배


울산에 가면 가장 멋있는 뷰가 공장뷰이다. 

 

 

[역사저널 40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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