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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벌거벗은 세계사

역사 속 제갈량과 사마의 대결 소설과 어떻게 차이? 132-2

[이전글 ] 사마의 생존비결 

 

제갈량과 사마의 첫 번째 대결

역사 속 제갈량과 사마의 첫 번째 대결은 삼국지 후반후의 맹달이라는 장군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일이다. 맹달은 위촉오 삼국과 모두 국경이 맏닿아 있는 신성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 지역은 원래 촉나라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맹달은 자신의 이익만 따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과거 관우가 손권에게 죽어갈때 지원군을 요청했는데도 보내지 않았던 인물이다.

 

 

 

이릉대전 유비, 관우, 조조, 장비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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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유비가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 위나라에 투항을 했다. 이후 맹달은 위나라에서 신임을 받았으나 사마의 만큼은 맹달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제갈량은 사마의와 맹달사이의 벌어진 틈을 파고들었다. 제갈량은 맹달에게 접근해 반란을 일으키라고 은밀히 설득한다. 맹달을 믿지 않는 사마의에게 배신 당하기 전에 먼저 반란을 일으키라고 설득했으나 사마의는 맹달의 반란 계획을 먼저 알아첸다. 이에 맹달에게 편지를 한통 보낸다. 

 

맹달에게 보낸 사마의 편지

 

이 편지를 받은 맹달은 고민하는 중 원래 반란을 일으키기로 한 날짜를 놓치게 되고 그 사이 빠르게 맹달의 성을 쳐들어갔고 제갈량이 도우러 올세도 없이 단16일 만에 맹달을 사로잡아 참수해 버린다. 역사에서는 맹달을 이용하려던 제갈량이 패배하고 사마의가 승리하게 된다. 

 

두 번째 대결 제갈량의 공성계 

제갈량은 마속이라는 장수를 신뢰하고 아꼈다. 그래서 마속을 가정이라는 곳으로 보내 사마의 군대와 맞서게 했다. 당시 제갈량의 명령은 쉽사리 사마의와 싸우지 말고 방어에 집중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마속은 사마의를 얕보고 제갈량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자신의 판단대로 전투를 진행하다가 결국 대패한다.  가정은 제갈량이 북벌에 있어 위나라로 진군하기 위한 중요한 요충지였기에 제갈량은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진격을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아주 적은 군사들로만 성안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사마의가 15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던 것이다. 이에 위기를 제갈량은 거문고를 연주하고 성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이것이 삼국지에서 가장 유명한 제갈량의 계책 중 하나 공성계이다. 

 

 

제갈량은 사마의의 의심 많고 조심스러운 사마의 성격을 꿰뚫어 보고 이런 성격의 사마의라면 성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사마의는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음에도 전군에게 퇴각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져 소설 속의 내용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제갈량과 싸운 사람은 사마의가 아니였다. 소설에서 극적인 재미를 위해 사마의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묘사한 것이다. 

 

한편 제갈량은 북벌에 계속 실패하게 된다. 북벌에 실패한 제갈량은 3년 동안 국력을 강화하는데 힘쓴다. 그리고 10만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로 쳐들어갔는데 당시 위나라를 지키던 사마의는 수비에만 집중하고 성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더 뛰어난 전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쟁을 길게 하면 수비하는 사마의에게 유리했던 것이다. 

 

그래서 제갈량은 사마의를 끌어내기 위해 계책을 냈다. 입구가 호리병처럼 생긴 계곡에 은밀하게 함정을 설치했다. 상방곡은 입구가 좁아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지형이었다. 

 

 

이 계곡 안에 구덩이를 파고 화약을 묻은 후 그 위에 불타기 쉬운 마른 장작을 쌓아 올려 군량미를 쌓아 놓은 것처럼 함정을 설치한 것이다. 사마의는 직접 두 아들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제갈량의 군량미를 태워버리기 위해 상방곡을 습격한다. 이곳에 매복해 있던 제갈량은 사마의가 안쪽 깊숙이 들어오자 계곡의 입구를 봉쇄한다. 그리고 불화살과 횃불을 던지며 화약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마의는 두 아들과 탈출에 성공한다. 그 이유는 갑자기 폭우가 내려 맹렬히 타오르던 불이 모두 꺼진 것이다.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진 사마의는 달아날수 있었던 것이다.

 

제갈량이 안타까워 하며 한말.

 

그러나 이 이야기는 완벽한 소설 속 이야기이다. 역사 속 사마의는 당시 다른 지역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갈량과 마주치지도 않았다. 삼국지 초반 많은 영웅들이 죽고  제갈량과 사마의를 대결구도로 만드는 것이 소설의 재미를 더할수 있는 요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각색된 소설로 인해 사마의는 제갈량의 지략에 패배하고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의 이미지로 낙인 찍혔다. 

 

마지막 대결

그리고 사마의를 <삼국지연의> 속 최대의 실패자로 만든 마지막 사건이 있다. 실제로는 사마의는 특별한 생존 비결을 통해 제갈량과의 라이벌전을 마무리했다. 그것은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는 것이었다. 

 

제갈량은 뛰어난 계책을 펼치면서도 계속 북벌에 실패했다. 당시 촉나라의 장수들은 연로했고 유비의 아들 촉나라 황제는 향략에만 빠져있어서 전쟁을 이어가는 것이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유비의 꿈이었던 삼국통일의 큰 꿈을 이뤄주기 위해 위나라 정벌을 멈출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마의는 철저한 대비를 했다. 사마의는 제갈량을 꿰뚫어 보고 공격해 올 곳을 예측한 후 그곳에 농부와 대장장이를 보내 시장을 만들었다. 시장에서 식량과 무기를 조달할수 있었고 제갈량의 길목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234년 제갈량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침략했다.  이때 사마의는 제갈량 군대의 배후를 급습했고 그 결과 오백여 명의 군사를 죽이고 천여 명의 포로를 잡아 승리를 거두게 된다.  사마의는 전쟁에 나서지 않고 수비에만 집중했다. 군량미가 떨어진 제갈량이 스스로 후퇴하길 기다렸다.  이런 사태를 대비해 스스로 자급자족 할수 있도록 병사들이 직접 농사를 짓게 했으나 10만 명이나 되는 군사를 모두 먹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사마의를 유인할 계책을 마련한다. 제갈량은 여인들의 장신구를 보내서 수비만 하는 사마의는 겁재이라며 도발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나가서 싸우지 않았다. 

 

 

그리고 사마의는 제갈량의 동태를 살펴보니 잠도 자지 않고 자신을 혹사하며 계속 일만하는 제갈량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은 꿰뚫어 본다. 삼국시대 가장 뛰어난 책사이자 충신이었던 제갈량은 결국 통일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마의의 예측과 같이 과로하다가 100여일 만에 오장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사마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퇴각하는 촉나라를 추격했다. 산모통이를 도는 순간 그 곳에 제갈량이 부채를 들고 멀쩡한 모습으로 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에 사마의는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게 되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은 제갈량을 본뜬 목각인형이었던 것이다. 제갈량이 자신이 전사한 후에 사마의가 쫓아올 것을 대비해서 제작해놨던 것이다. 

 

 

 

이 일로 죽은 제갈량이 살아있는 사마의를 물리쳤다는 중국속담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 또한 소설 속 이야기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사마의가 도망치는 것으로 각색한 이유는 사마의를 죽은 제갈량마져 두려워하는 겁쟁이로 의화화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명백한 역사적 진실은  사마의가 제갈량을 이겼다는 것이다. 

 

 

고평릉 정변 

제갈량이라는 라이벌을 물리친 사마의는 위나라에서 더욱 승승장구 하게 되고 그도 어느 덧 예순 살이 되었다.  그러나 황제 조예가 갑작스럽게 죽게 되고 그의 아들인 조방이 불과 8세로 황제에 즉위한다. 신하들 사이에 권력 싸움이 일어나고 이에 사마의를 아픈척을 하며 관직에서 물러난다. 예전보다 더 심하게 정신에 이상이 있는 척하며 심지어 음식을 질질 흘리는 척까지 했다. 

 

 

그래서 그를 견제하던 세력은 방심하고 경계를 풀게 된다.  하지만 그 틈을 타서 아들들과 사병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249년 수도가 비어있는 순간 약 3천 명의 군사를 동원해 정변을 일켰다. 마침내 사마의는 위나라를 정변으로 점령하고 새로운 나라 서진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그리고 사마의는 직접 왕에 오르지 않는 대신 아들들에게 모든 권한을 물려준다. 당시 사마의는 이미 70세가 넘은 나이였고 다른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자신이 직접 제압하기 어려울 것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사마의 죽음 

결국 751년 사마의는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사마의 아들 사마소는 서진이라는 나라를 세워 촉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사마소가 죽은 후 사마염이 오나라까지 점령하면서 천하 통일을 이루면서 혼란했던 삼국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서진의 천하 통일 후 사마염은 사마의를 고조 선황제로 추대하게 된다. 이로써 사마의는 삼국통일를 이룩한 왕조의 시조가 된 것이다. 유비도 조조도 아닌 삼국통일의 최후의 승자는 사마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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