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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여인천하 승자는 : 중종이 가장 사랑한 경빈 박씨는 왜 사약을 받았나? 65

조선 11대 왕 중종대 궁중  여인들의 암투를 그려 선풍적인 인기를 끈 드라마로 여인천하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많은 인기를 얻은 등장인물 경빈 박씨가 있다. 중종은 경빈 박씨를 포함해 부인을 12명이나 두었던 왕이다. 

 

경빈 박씨 분

 

여인천하 속 많은 궁중 여인들 중 중종이 가장 사랑했던 인물은 경빈 박씨이다. 경빈 박씨는 20여 년 동안 중종의 총애를 받으며 많은 권세를 누린 여인이다. 

 

중종반정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자 조선 9대왕 성종의 아들 진성대군은 신씨와 결혼을 해 잘살고 있었다.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이들은 하루 아침에 왕과 왕비가 된다. 조선의 11대 왕 중종이 즉위한 지 7일  후 반정 세력은 강압적으로 중전의 폐위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반정세력은 왜 단경왕후를 폐위시켰을까?  

 

▼드라마 < 7일의 왕비 > 단경왕후는 누구?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 주인공

 

드라마 < 7일의 왕비 > 단경왕후는 누구?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 주인공

드라마 7일의 왕비는  조선 11대 왕 중종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이다. 연산군 이복동생 진성대군 중종은 총 3명의 비를 맞이하게 되고 박민영 배우가 했던 역할이 단경왕후(1487~1557)로 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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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후궁들 

그렇게 단경왕후는 중전이 된지 7일만에 쫒겨났고 중종은 단 3일만에 왕비가 될 4명의 새 후궁들을 들인다. 4명의 후궁은 숙의 윤씨, 중종반정 삼등공신 윤여필의 딸로 일등공신 박원종의 외조카였다. 희빈 홍씨는 중종반정 일등공신 홍경주의 딸이었고 숙의 나씨는 당시 지방관 나숙담의 딸, 마지막 경빈 박씨는 그냥 평범한 양반집의 딸이었다. 중종은 이들중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경빈 박씨를 눈여겨 봤다. 그러나 중전으로는 중종반정 일등공신의 딸 숙의 윤씨가 되었다.

 

경빈 박씨 중전을 꿈꾸다. 

그리고 중종 즉위 4년 만에 경빈 박씨는 아들 복성군을 낳았고 복성군에 이어 연이어 아이를 갖게 된다. 중종은 복성군을 끔찍이 아꼈다. 그만큼 중종은 경빈을 총애했다. 그런데 중종의 정비 장경왕후가 중전이 된지 8년만에 아들을 낳게 된다. 아무리 복성군이 장자라 해도 왕비의 아들 원자를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자를 낳은 뒤 장경왕후가 산후병으로 죽고 만다. 그렇게 중전의 자리가 공석이 되고 경빈 박씨는 중전을 꿈꾼다. 

 

문정왕후 등장 

중전의 자리는 2년 넘게 공석이었고 1517년 7월 문정왕후가 중종의 세 번째 중전으로 결정된다. 또한 중종은 6살 된 장경왕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경빈 박씨의 꿈은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중종은 여전히 경빈 박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작서의 변 

그러던 어느 날 세자의 거처인 동궁에서 쥐의 사체가 발견되고 누군가 세자를 해하기 위해 부정한 기운을 담아 저주를 한 것이었다. 이 사건의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된 인물이 경빈 박씨였고 박씨의 궁녀들을 고문하지만 경빈 박씨라고 실토하지 않았다. 이때 자순대비 중종의 어머니가 경빈 박씨의 딸 혜순옹주 궁녀들의 의심스러운 행동을 전해 들었고 경빈을 강하게 의심하게 되면서 1527년 4월 중종은 결국 경빈 박씨를 폐서인 시켜 복성군과 함께 유배를 보내버린다. 

 

여인천하의 최후 승자는? 

그런데 경빈 박씨가 유배간지 6년만에 세자의 거처에서 또다시 저주의 물건이 발견된다. 종이로 만든 사람의 머리와 목패였다. 그 목패에는 세자를 찢어 죽이고, 중종을 목 졸라 죽이고 문정왕후의 목을 베어 죽이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저주의 배후로 경빈 박씨의 사위 홍여가 지목되었고 경빈 박씨가 사위를 시켜 왕실 일가를 저주했다는 것이다. 이에 중종은 결국 1533년 5월 23일 경빈 박씨와 복성군에게 사약을 내려 죽인다. 

 

경빈 모자가 죽은 후 백성들 사이에서는 기묘한 소문이 떠돌았다. 문정왕후가 경빈 박씨에게 죄를 씌워 그 아들까지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경빈을 죽게 한 왕실 저주 사건의 배후에 문정왕후가 있었다는 소문이 야사로 전해진다. 경빈이 죽고 중종과 혼인 17년 만에 문정왕후는 아들을 낳게 되고 인종이 즉위한지 9개월만에 사망하고 다음으로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 즉위했던 것이다. 그렇게 문정왕후가 여인천하의 최후의 승자였던 것이다. 

 

 

▼문정왕후는 태릉에 왜 홀로 묻혔나?

 

문정왕후는 태릉에 왜 홀로 묻혔나?

[역사저널 392회] 태릉의 상징 중 하나는 태릉선수촌 1966년 6월 국가대표선수의 강화 훈련을 위해 설립된 종합 선수합숙훈련장이 있고 태릉갈비도 유명하다. 또한 문정왕후 단릉인 태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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