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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안중근 의사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35 회)

안중근 기념관 

중국 하얼빈역 안에는 안중근 기념관이 있다. 2014년 1월 19일 안중근 의사 의거를 기리기 위해 설립된 기념관이다. 그곳에 안중근 의사 동상이 있고 그 위에 시계는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 시간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시각이다. 

 

중국 하얼빈역 /9시 30분에 시계가 멈춰있다.

 

안중근 유년시절

안중근은 안태훈과 조마리아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고종시기에 태어났고 안중근 집안은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무인 가문의 집안이었다.  가슴에 7개의 사마귀를 가지고 있었는데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았다는 뜻의 아명 응칠을 붙였고 커가면서 안중근의 사격 솜씨는 특출났다. 

 

안중근

 

도마 안중근 

그러던 어느 날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했고 안중근 부자는 나라를 지킨다는 생각으로 동학농민혁명 진압군으로 싸웠다. 이후에 동학농민 운동이 진압이 되었으나 고위 관리들이 안중근 부자가 동학농민군에게서 빼앗은 쌀을 군량미로 사용했는데 그것을 다시 내놓으라고 했고 이것을 핑계삼아 고위 관료들은 안태훈, 안중근을 반역죄로 몰아세웠던 것이다. 위기에 몰린 안중근 부자가 피신했던 곳이 명동성당(=종현성당)이었고 이후 안태훈은 천주교 신자가 된 뒤 가족들에게도 전파한다. 

 

안중근 역시 천주교의 만민평등사상을 접하고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평범하다는 것을 깨닫고 천주교 신자가 된다. 이후 안중근의 호는 '도마' 인데 이것은 천주교 세례명 토마스이다.  

 

애국계몽운동 시작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아가 을사 늑약을 체결하니 치욕적인 현실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안중근은 일제에 저항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제일먼저 가산을 팔아 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1906년 진남포 돈의학교를 인수 한뒤 교장이 된다. 그리고 교육 과정에 교련을 배정해 학생들에게 총기 훈련을 시켰고 같은 해 6월 영어를 가르치는 삼흥학교까지 설립한다. 

 

항일운동 시작 

1907년 일제가 고종은 폐위시키고 대한 제국의 군대까지 해산시키자 소극적인 애국계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본적격인 항일운동을 위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 그래고 그곳에서 300여명의 사람들과 항일 의군부대를 조직 의병 지휘관으로 국경 지대에서 일본군 소탕에 나섰고 함경북도 홍의동과 신아산 두 차례의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하다. 그러나 안중근이 풀어준 일본 상인 포로들이 안중근 부대의 위치를 일본군에게 알렸고 일본군은 엄청난 화력을 앞세워 이 부대를 기습 공격해 보복했고 이로 인해 300여명 중 20명만 살아남는 참패를 당한다. 

 

단지동맹 

연해주로 돌아왔을때 안중근이 포로를 풀어줬다는 소식이 이미 퍼져있었고 이로인해 동포들의 시선은 냉담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11명의 동료들을 가까스로 모아 1909년 2월 7일 단지동맹을 결의하다. 그리고 그 손가락 피를 모아 태극기에 '대한독립' 네 글짜를 남겼다. 

 

태극기에 대한 독립이라는 글짜를 남겼다.

 

 

안중근이 하얼빈을 선택한 이유 

그리고 안중근은 고종을 협박해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조선 총독부의 전신 통감부의 초대 통감에 오른 일제 침략의 핵심 인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1909년 10월 하얼빈으로 향한다. 1905년 일제는 러일전쟁 승리로 결국 한반도의 독점적 영향력을 확보했고 일본과 러시아는 만주에 속한 하얼빈에서 한반도와 만주 문제를 협의하고자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했던 것이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처단하면 일제의 야욕을 전 세계에 알리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얼빈 의거 

1909년 10월 26일 운명의 날 낡은 양복을 입고 권총을 챙겨 오전 7시경 하얼빈역에 도착 , 오전 9시경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도착하고 마침내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6발의 총을 발사 총에 맞은 지 30분 만에 이토 히로부미는 사망한다. 거사를 마친 안중근은 '꼬레아 우라' 라고 대한 만세를 외친후 조금의 저항도 없이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https://youtu.be/4znhwjQxjAM?si=4vTId66c9jX5OA3u

안중근 하얼빈 의거 실제 영상보기

 

 

뤼순까지 끌려간 이유 

그리고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뤼순까지 기차를 타고 무려 이틀이나 걸리는 약 900km를 이동하며 끌려갔다. 하얼빈 의거 10여년 전 일본은 중국 정부와  러청조약을 통해 철도 부설권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얼빈은 중국영토였으나 실질적으로 러시아 통치하에 속한 땅이 되었다. 원래 대로는 이로 인해 러시아에서 재판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이런 국제 관계를 무시한 채 안중근의 재판권은 바로 일제로 넘어갔다. 

 

 

 

하얼빈역의 경비를 맡았던 러시아는 이토 사망사건에 자유로운 수 없었고 이에 일제측의 요구에 따라 안중근의 재판권을 곧바로 일본에 넘겨버렸다. 그래서 일본은 러일 전쟁 이후 차지했던 중국 뤼순감옥에 가둔 것이다. 이곳이라면 일본이 자신들의 통치권 아래에서 재판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안중근의 재판을 두고 이렇게 치밀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그리고 첫 재판 일주일 뒤인 1910년 2월 14일 속전속결로 안중근의 사형선거가 내려졌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1910년 3월 26일 36살의 안중근은 결국 형장의 이슬이 되어 생을 마감한다. 안중근의 죽음 이후 안중근의 유품은 안중근의 자서전과 미완성의 동양평화론 그리고 가족사진이었다. 

 

안중근이 마지막까지 품고 있던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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