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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벌거벗은 세계사

싱가포르 식민지 시기 역사 (영국 식민기->일본 식민지 )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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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식민기

싱가포르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후 영국은 싱가포르 개척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1822년 가장 먼저 한 일은 척박한 땅을 개간한 것이다. 강 남쪽의 습지와 늪지대를 평평하게 만들고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상업 지구로 개발한다. 또한 1868년 제일 중요한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싱가포르 섬 한가운데 최초의 저수지 맥리치 저수지를 건설한다. 

 

싱가포르 맥리치 저수지

 

초기에는 작은 저주지였으나 현재는 약 6배 규모로 개발 자연공원으로 이용 중이다. 이 저수지는 싱가포르의 식수 공급과 선박들의 용수 공급처로 활용되었다. 또한 해적과 외부침략을 막기 위해 군사시설을 만들었다. 이후 이곳은 영국 식민정부의 중요한 지휘 본부가 된다. 

 

 

 

군사 기지가 완성 된 후 영국은 해적 소탕을 시작한다. 영국의 적극적인 도시 개혁 프로젝트로 죽음의 섬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의 새로운 항구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영국은 항구를 홍보하기 위해 1819년 싱가포르를 자유무역항으로 선포한 후 관세를 면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싱가포르는 빠르게 입소문이 났고 개항 초기 싱가포르는 약 3천 척의 배가 드나드는 대항구로 성장한다. 

 

1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싱가포르는 다른 나라에서 수입한 물품을 수출하거나 가공 후 재수출해 매매 차익을 얻는 중계무역을 하게 된다. 영국은 말레이 반도에 고무와 주석 농장을 대규모로 건설하고 천연 원료를 가공해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하며 계속적으로 성장한다.  

 

수에즈 운하 개통

 

결정적으로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멀리 아프리카 희망봉을 지나 인도양을 거쳐 왔던 루트가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최단 거리로 믈라카 해협이 인기 상승하게 된 것이다. 이전에 영국 런던에서 싱가포르까지 최소 120일이 소요되었으나 수에즈 운하 개통 후 50일로 단축이 된다. 

 

 

 

이렇게 싱가포르는 수에즈 운하 개통 후 유럽 아시아 무역을 잇는 중요한 항구로 자리매김하면서 20세기 들어와서는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항구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싱가포르가 발전을 하게 되자 전 세계에서 이민자들이 싱가포르로 몰려들게 된다. 늘어나는 인구로 인해 인종별로 거주 지역을 구분했다. 

 

거주 지역 구분 지도

 

싱가포르 중국 화교 영향력

그리고 싱가포르의 성장을 견인하는 중국 화교가 유입되었다.  당시 싱가포르 인구의 과반수 이상이 화교였다. 당시 화교들은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일하면 돈을 벌었고 부동산 도시 개발 등 사업을 확장하며 거대한 부를 쌓았다. 지금도 싱가포르의 화교의 위치는 광장히 절대적인데 싱가포르 대표 은행 중 하나가 싱가포르 화교 은행이고 싱가포르 상장 기업의 약 80%가 화교 기업이다. 

 

싱가포르에 있는 화교 관련 기업과 은행

 

 화교의 영향력이 커지자 영국은 대우를 해주기 시작한다. 영국이 화교들에게 넘겨 준것은 아편 사업권이었다. 당시 아편은 동남아 전역에 퍼져있었기 때문에 화교가 돈벌이를 하면 영국은 세금을 더 많이 거둬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최적의 상품이었다. 

 

일본의 식민기 (숙칭 대학살) 

그러다가 1941~1945년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영국령인 홍콩 점령을 시작으로 남진을 하며 1941년 2월 싱가포르까지 차지한다. 그리고 싱가포르의 화교를 탈취하기 위해 1942년 2월~3월 약 한 달간 싱가포르 화교들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숙칭대학살이다. 일본은 싱가포르에 거주하던 화교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인종 청소 사건이었다.  당시 약 90만 싱가포르 인구 중 최대 약 5만 명의 화교가 사망했다.  이렇게 국제적인 항구로 성장하던 싱가포르는 일본의 식민시기를 겪으면서 암흑기를 거치면서 1945년 8월 광복을 맞게 되고 일본은 3년만에 싱가포르에서 철수하게 된다. 

 

영국 자치 정부된 싱가포르

일본이 철수하자 다시 영국이 싱가포르로 들어오지만 이때는 전세계적으로 각 민족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 자결주의 이념이 퍼져 싱가포르 지배 지역에서 자치권을 요구하게 된다. 싱가포르가 국제 사회에서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는 독립국가가  아닌 자치권을 요구한 이유는 싱가포르는 오랬동안 영국의 식민지였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자체 군사력이 전무한 상태였다. 결정적으로 싱가포르의 핵심 산업은 중계무역에 의존해 오고 있어서 주변국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이 어려워 자치 정부를 요구한 것이다. 그래서 1957년 말라야 연방만 독립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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