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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광한루 유교와 도교의 이상세계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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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 뜻

1444년  세종 26년에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이곳을 한번 지나가면서 이곳의 광한루에 올라가 풍광을 보고 이곳은 지금 지상의 세계가 아니라 달속에 있는 아름다운 궁전 즉 광한청허부와 같다고 하여 그때부터 이곳을 광한루라고 부르게 되었다. 광한루의 의미는 달속에 있는 아름다운 궁전과 같다는 의미이다. 광한은 아름다운 곳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시원한 곳을 뜻하기도 한다. 

 

광통루->광한루

 

 

 

광한루 호수 속 세개의 섬

광한루는 신선이 사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천상의 세계를 갈망해 온 선비들이 지상에 재현해 놓은 이상적인 공간으로 유교와 도교의 사상이 집대성 된 것이다. 황희 정승이 건립한 광통루로 25년 후 하동부원군 정인지로부터 얻게된 이름 광한루는 당시에 호수와 운치를 더하는 오작교는 없었다. 황희 정승이 광통루 건립한 160여년 후에  1582년 남원부사로 와있던 장의국과 마침 이때 이곳에 와있던 송강 정철 선생이 의견을 합쳐서 광한루 앞으로 흐르던 가느라단 물줄기를 막아 호수를 만들었다.

 

방장도, 봉래도, 영주도
광한루 호수속 세개의 섬 방장도, 봉래도, 영주도

 

달의 궁전인 광한루 앞에 선녀들이 노닐 던 은하수를 조성하고 여기에 은하수를 건너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오작교를 놓고 도교의 이상향인 삼신산을 상징하는 세개의 섬이 조성되면서 천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봉래도

세개의 섬 중 처음은 봉래도로 전설의 삼신산 중 하나인 봉래산을 상징하는 섬으로 우리나라의 금강산을 상징한다. 쑥봉자를 써서 쑥 봉이 나오는 산이라는 의미로 불로초 불사약이 나오는 불로장생의 거점 공간이라고 볼수 있다. 봉래도에는 대나무를 많이 심어놨는데 청렴결백, 정직의 의미가 있고 또한 상서로운 나무의 상징으로 봉황이 나타나서 태평성대에 이 대나무 죽순 열매와 이슬을 먹고 상서로운 태평성대를 연다는 의미가 있는 섬이다.

 

봉래도

영주도

두번째 섬 영주도는 영주라고 하는 의미는 바다 위에 높게 솟아 있는 신산의 의미가 있고 바다가 멀리 펼쳐져 있는 제주도 한라산을 영주산에 대입시켜 누각을 지었다고 한다.  영주도에 심은 배롱나무 (백일홍 나무)도 선비들이 좋아했던 나무 중 하나로  백일 동안 꽃이 피고 지고를 반복하는 나무로 일편단심 충신의 가치를 이 나무 속에 담아 놓았다. .

 

광한루 속 영주도
광한루 속 영주도
영주각과 배롱나무

 

또한 배롱나무의 특성을 보면 껍질이 벗겨져 속살이 드러나는 형태로 표리부동하지 않고 고진감래의 가치를 반영하는 나무이다.

 

 

 

방장도

세번째 섬 방장도는 삼신산 중 지리산을 상징한다.  이 섬에는 버드나무가 많다. 이 버드나무는 도가적인 이상향의 세계로 풍류적인 가치를 담고 있고 생태적으로 끊임없는 생명력이 있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가지들이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방장정

 

 

오작교 

천상과 지상을 잇는 다리 오작교는 앙쪽 끝은 처지고 가운데는 높여서 무지개처럼 만들고 교각 하단부에 반원형의 구멍이 네 개가 나있는 다리, 홍예 다리는 길이가 58m 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홍예다리이다.  반달형 형태가 물을 만나 원형의 형태를 띄면서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반달 4개 를 만든 이유는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 동서남북 , 춘하추동의 우주 만물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볼수 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의 공간에서 조화를 이루는 상징적인 공간을 조성한 것이다.

 

 

오작교가 가로지르는 광한루 호수에는 많은 잉어가 살고 있다. 예로부터 잉어는 다산의 상징으로 자손의 번창과  남원 고을의 부흥을 상징하는 희망을 담았다.  사람들의 기원이 담긴 또 하나의 상징물 자라석은 화마를 몰아내는 수호신의 의미로 광한루가 처음 지어질때 부터 있던 조형물이다. 

 

 

광한루 느티나무

주변에 느티나무가 많다. 느티나무는 전통적으로 학자수라고 하여 처음에는 볼품이 없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웅장한 자태를 보이기 때문에 학자와 같은 품성을 닮았다고 해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 느티나무, 회화나무 등은 서양에서도 스칼라 트리= 학자수라고 하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광한루 느티나무
광한루 느티나무

 

느티나무는 여름에 노란색 꽃을 피우는데 노란색은 우주의 중심으로 인식되어 이 느티나무 꽃 차를 마시거나 음식을 해 먹으면  침침해졌던 눈이 맑아지는 영안의 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학자의 공간, 정원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가 있고 어린 학생을 가르치던 회초리도 느티나무 가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광한루 느티나무
광한루 느티나무

  

 

광한루 

광한루는 관에서 관리를 했기 때문에 행사나 연회등 주로 관리와 같은 상류층이 사용하던 곳으로 광한루 안에는 선비들이 남긴 시 170여 편이 걸려있는데 대부분의 시가 광한루에 바라본 멋진 풍광에 대한 내용이다. 

 

광한루 속 현판들
광한루 속 현판들

이렇게 아름다운 광한루는 정유재란때 일본에 의해 불에 타게 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1599년 정유재란 2년 뒤 (선조 32년) 남원부사 원신이 작은 규모로 광한루를 복원했고 세월이 흘러 페허가 된 것을 1626년 (인조 4년) 남원부사 신감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현재 광한루 현판도 남원부사 신감의 조카 신익성의 글씨이다.  

 

광한루 현판은 남원부사 조카 신익성의 글씨
광한루 현판은 남원부사 조카 신익성의 글씨

 

광한루 호석

1960년대 까지만 해도 광한루 주변에 시장이 있었고 그 시장거리를 호석거리라고 불렀다.  호석 앞쪽으로 견두산이 있는데 그곳의 들개들이 요란하게 울적마다 남원에 큰 재앙이 생겨 개를 이길수 있는 동물 호랑이를 보호석으로 세워 견두산을 바라보게 만들었다고 한다.  보호석 호석 주변을 호석거리라고 했고 조선시대에는 성 밖 광한루가 있었고 시장이 있었다.   

 

광한루 호석
광한루 호석
성밖에 위치한 광한루와 장시
성밖에 위치한 광한루와 장시

 

익루

익루는 1795년 남원 부사 이만기가 증축한 것으로 평상시에는 악공 대기실, 취문객들이 추위를 피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1877년 (고종 14년) 남원부사 이상억은 광한루를 대대적으로 증수하고 호남제일루와 계관(달나라 계수나무를 볼수 있는 곳) 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광한루 익루
광한루 익루
호남제일루 계관 현판호남제일루 계관 현판
호남제일루 계관 현판

월랑

1879년 너무 커진 광한루가 북쪽으로 기울어지자 남원부사 이용준  월랑을 가설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계단식 현관으로 천상으로 구경을 가는 계단인 것이다. 월랑에 코끼리가 보인다. 암수가 있는데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고 불교에서는 수호신을 뜻하는 동물이고 일반인들에게는 힘이 가장 센 짐으로 생각되어 월랑을 튼튼하게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이 서있는 곳이 월랑이다.
사람이 서있는 곳이 월랑이다.
월랑, 복도
월랑, 복도
코끼리 상이 월랑을 받치고 있다.
코끼리 상이 월랑을 받치고 있다.

 

평양의 부경루,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와 더불어 남원 광한루는 우리나라 4대 누각의 하나로 손꼽히게 된다. 

 

 

남원 춘향제의 기원 (일제시대 감옥소였던 광한루 1-3)

 

남원 춘향제의 기원 (일제시대 감옥소였던 광한루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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