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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경혜공주, 단종의 누이에서 노비가 된 비운의 공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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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딸은 모두 행복했을까?”
경복궁 뒤편 고즈넉한 북촌 한옥마을. 그곳에는 궁궐보다 아름다운 집이 있었다. 그러나 그 집에서 벌어진 일은 조선 최고의 비극 중 하나였다. 단종의 친누이, 경혜공주의 인생은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공주에서 노비로’, 그리고 다시 ‘비구니’가 된 여인이었다.

 

 

🏯 공주의 시작, 문종의 사랑과 북촌의 신혼집

경혜공주는 조선 제5대 왕 **문종(文宗, King Munjong 1450~1452)**과 권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문종의 어머니(현덕왕후 권씨)와 경혜공주도 함께 경복궁 자선당에서 살았다. 문종의 어머니 권씨가 아들을 낳았는데 경혜공주의 남동생이자 조선 6대왕 단종이었다. 그러나 아들을 낳자마자 세상을 떠난 어머니였고 불운을 피하기 위해 6살의 나이에 경혜공주는 궁궐을 떠나 살게된다. 

 

1450년 경혜공주가 16세가 되었을때 할아버지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자 상중에는 결혼을 할수 없기 때문에 경혜공주를 빠르게 결혼을 시킨다.  그로부터 1 개월 후 세종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문종은 딸에게 집 한 채를 제대로 못해준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려 했고 세종의 3년 상을 다 치른 후 경혜공주를 위해서 궁궐과 가까운 지금의 북촌한옥마을에 양덕방이라는 신혼집을 마련해준다. 

 

현재 양덕방은 사라졌다.

 

이 집은 무려 40채가 넘는 기존 집을 헐어내고 지은 작은 궁궐 수준의 대저택이었다. 문종은 딸에게 집을 선물한 후 1452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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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cess Gyeonghye was the daughter of King Munjong and Lady Kwon. She lived with her grandmother in Gyeongbokgung, but after her mother died giving birth to her brother, Danjong, Gyeonghye had to leave the palace at age six — people believed it would prevent bad luck.

When she turned sixteen in 1450, her father married her off quickly before King Sejong passed away because weddings weren’t allowed during royal mourning. After the mourning ended, King Munjong felt bad he hadn’t given her a proper house, so he built a grand mansion for her near the palace — in today’s Bukchon. He even bought up over 40 houses to build it.

⚔️ 계유정난, 그날 밤의 비극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 후, 누이였던 경혜공주의 집은 자연스럽게 그를 보호하는 공간이 된다. 하지만 1453년, 10월 10일 밤 수양대군(首陽大君, Prince Suyang)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반정을 일으키고, **계유정난(癸酉靖難, Gyeyujeongnan)**이라 불리는 그날,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혜공주의 집을 습격한다.

 

수양대군은 **“살생부(kill list)”**를 만들어 단종을 따르던 대신들(단종 최측근 김종서를 처단 이후)을 경혜공주의 집으로 불러 하나하나 죽인다. 이 사건은 단순한 쿠데타가 아닌, 공주의 사적인 공간이 정치의 피로 물든 순간이었다.

 

 

 

계유정난 단종 이야기(황표정사)영월 단종 유배지 (청령포,장릉)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15회 후반,16회] 오늘의 탐사지: 영월, 단종 유배지 주제: 단종의 생애 출연자: 정유미 선녀들 영월 여행지 순서 1.선돌 2.청령포-청령포 안 유배지터 2달 머뭄-관음송 3.관

jangane.tistory.com

 

🪦 정종의 유배와 경혜공주의 몰락

남편 **정종(鄭悰, Jeong Jong)**은 반대 세력으로 몰려 전라도 영광과 광주로 유배, 거기서 혹독한 연금과 고문, 그리고 **“노비로 강등(enslavement)”**당한다. 그러나 정종은 위래안치 상황에서 밖으로 나갔다고 해서 능지처참을 당한다. 
경혜공주 역시 **순천의 관노비(官奴婢, government slave)**로 전락하고, 유배지에서 노역을 강요받는다.

 

경혜공주는 유배 중이던 광주에서 아들을 낳고, 또 한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었다. 세조는 “아들이면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그의 부인인 **정의왕후(貞懿王后, Queen Jeonghui)**는 공주의 아이를 여장시켜 궁에서 몰래 키운다.

 

세조는 훗날 아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眉壽(미수, long-life eyebrows)”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피를 이어야 한다는 인간적인 동정심이 마지막에 나타난 것이다.

 

🧘 정업원에서 비구니로 살아간 공주

이후 세조는 경혜공주 신분을 회복시키지만, 궁으로 돌아가기를 거절한다. 그녀는 **서울 종로 숭인동(崇仁洞)**의 **정업원(淨業院, Buddhist retreat)**으로 들어가 **비구니(Buddhist nun)**가 된다.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도 이곳에 머물렀다.

 

숭인근린공원 속 정순왕후 이야기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는 조선 단종의 비(妃)로, 15세에 왕비가 되었으나 1455년 수양대군(세조)의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폐위된 후 궁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그녀는 동망산 기슭

myvoice.wissue.net

 

남편을 잃고, 동생을 잃고, 자식만을 위해 살았던 그녀는 모든 권력과 지위를 내려놓고 조용한 삶을 택한다.

하지만 자식들이 여전히 노비 신분이었던 탓에, 자녀의 연좌제( "guilt-by-association law." ) 처형 가능성을 막기 위해 다시 세조에게 간절히 상소( a very desperate appeal )를 올린다.
결국 자식들은 신분을 회복하고, 정미수는 벼슬까지 오르게 된다.

🪦 마지막, 사랑했던 남편 곁으로

경혜공주는 아들이 벼슬에 오른 지 7개월만인  39세에 세상을 떠난다. 그녀는 남편 정종과 함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합장되어 있다.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고읍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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