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History/art&culture 썸네일형 리스트형 피카소가 그린 한국전쟁 (6.25 전쟁) 에 대한 그림들 피카소는 작품에 전쟁과 평화에 대한 메세지를 많이 담았고 우리나라를 주제로 그린 작품도 있다. 프랑스 발로리스에 남긴 6.25 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 라는 작품이 있다. 작품 발로리스는 도자기로 유명한 마을인데 1948년부터 피카소가 노년을 보낸곳으로 그림으로 지친 심신을 도자기를 구우면서 지냈던 곳이다. 발로리스는 칸에서 차로 20분거리에 있는 곳으로 그곳에 피카소 박물관있다. 이곳은 한때 옛 수도원이었던 곳으로 반원형 터널에 벽화로 를 그렸는데 한쪽에는 전쟁, 다른 한쪽에는 평화를 기원하는 그림을 그렸다. 1952년 한창 6.25 전쟁이 진행되던 시기에 그린 그림이다. 작품 분석 전쟁 장면에 괴물처럼 보이는 괴수가 피묻은 칼을 들고 있고 다른 한손에는 세균전에 대한 공포심을 표현했고 왼쪽 방패를 든 .. 더보기 피카소 게르니카 작품 해설 및 역사적 배경 [이전글] 게르니카 폭격 이야기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쪽에 있는 도시 이름이다. 게르니카를 그렸을 당시 피카소의 나이는. 1937년 56 세였다. 한달 만에 완성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폭 8m 높이 3.5m의 거대한 작품이다. 역사적 배경 스페인은 전성기를 지나 급격히 쇠락하면서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배했고 뒤늦은 산업화와 경제 대공황의 위기등으로 힘들었다. 공화국에서 왕정복고 등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겨쳤고 1931년 좌파연합의 선거 승리로 제2공화국이 선포된다. 1931~1936년까지 학살,암살, 폭력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40여 차례의 쿠데타로 극심한 혼란과 분열이 지속되다가 결국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다. 게르니카는 바스크 인근에 위치한 도시로 스페인의 대표 .. 더보기 뭉크 < 절규 > 의미는? (4가지 버전의 절규 ) 노르웨이 국민화가로 알려진 에드바르 뭉크의 는 북유럽 최대 규모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국립미술관에 걸려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뭉크는 밤의 방랑자라는 수식어가 어울렸던 작가로 뭉크의 는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았던 작품이다. 뭉크의 뭉크의 는 회화로 4개의 버전이 있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소더비 경매에 나온 파스텔 버전의 는 1억 2천만 달러로 단 15분만에 낙찰이 되었고 우리나라 돈으로 약 1358억원의 고가로 낙찰되었다. 속 인물은 뭉크 자신을 표현했다. 오슬로 에케베르크 언덕에 갔을 때를 회상하며 느꼈던 느낌을 표현한 것으로 뒷쪽에 남성 두명이 보이고 뒤쪽 배경은 피오르 협곡을 표현, 검붉은 노을을 표현한 것이다. 원래 제목은 고 자신이 서있던 곳에 공포스러운 소리에 괴로워하는 상황.. 더보기 단테 신곡 줄거리 속 9개의 지옥은 무엇? [이전글] 단테 신곡 의미 단테 신곡 줄거리 단테가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는다. 숲에서 나타난 괴수 세마리를 보고 굉장히 놀란다. 여기서 세 마리 동물은 인간이 죄를 짓게 하는 3가지 악의 본성을 의미하는데 늑대는 탐욕, 사자는 교만, 표범은 정욕을 의미한다. 이때 베르길리우스(단테가 가장 존경하던 시인) 가 나타난다. 그와 함께 순례길을 떠나게 된다. 지옥문 앞 어두운 숲 지옥문 앞에 도착한다. 단테가 생각한 신곡 속 지옥은 춥고, 멈춰져 있고 어두운 곳으로 죽음의 희망조차 없는 곳으로 9옥까지 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심각한 죄를 단계별로 묘사하고 있다. 로뎅의 보기 로뎅의 속 생각하는 사람 현대 조각의 아버지 거장 로댕이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쳐서 만든 최고의 걸작이.. 더보기 로뎅의 < 지옥의 문 > 속 생각하는 사람 현대 조각의 아버지 거장 로댕이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쳐서 만든 최고의 걸작이 바로 이다. 지옥의 문은 7M정도 되는 거대한 문으로 1880년 프랑스 정부가 실제로 장식미술관의 중앙문 정문으로 만들려고 제작을 의뢰했다. 로댕은 피렌체 산 조반니 세례당의 에 감명받아 지옥을 주제로 제작하게 되었다. 지옥의 문 중간에 프로젝트가 중단이 되었으나 로댕이 작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만들었으나 완성을 지키지 못한다. 1926년 로댕 사후 10주년에 로뎅의 작품을 모아서 지금의 청동 을 만들었다. 지옥의 문에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200여명의 인물이 조각되어 있다. 생각하는 사람 200여명의 인물은 독립상으로 만들어졌고 그 작품들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이 문 바로 위에 이다. 로댕의 대표작으로 여기는 작품이 인데 지옥.. 더보기 일제강점기 속 최초 크리스마스 씰 (Christmas seal) -셔우드 홀 / 엘리자베스 키스 우리나라 최초 크리스마스 씰 우리나라의 최초의 크리마스 씰을 만든 사람은 셔우드 홀로 한국에서 의료봉사를 하던 로제타 홀의 아들이다. 셔우드 홀은 이모처럼 따르던 박에스터(한국 최초 여의사)마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자신도 부모님처럼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 셔우도 홀이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한 사람이다. 셔우드 홀은 의사가 되기 위해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1928년 황해도 해주에 돌아와 한국 최초 결핵 전문 요양 병원인 해주 구세요양원을 설립한다. 병원 운영을 위해 셔우드홀은 9개의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게 된다. 그 중에 1932년 첫 번째로 발행됐던 남대문 씰이었다. 그러나 처음 크리스마스 씰의 도안 이것이 아니였다. 이순신의 거북선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이순신 거북.. 더보기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유네스코 등재되다.( 크리스마스 휴전 역사)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탄생 배경 오스트리아의 신부였던 요세프 모어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알프스의 작은 성당에서 미사를 들이기 위해 작곡했다고 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과 독일군이 전장 한가운데 대치하던 상황이었다. 1914년 12월 24일은 전쟁 후 첫 크리스마스 이브였고 참호 밖으로 울려 퍼진 익숙한 선율, 독일군 진영에서 시작된 캐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에 반대편 영국군 진영에서 백파이프 연주로 화답을 했고 두 진영들은 서서히 경계를 풀고 노래가 끝나자 영구군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영화는 실화를 토대로 만든 영화이다. 1914년 크리스마스 아침에 독일군들은 펫말을 들고 나와 우리는 당신을 쏘지 않겠다고 했고 영국군도 크리스마스만큼은 전쟁하지 말자고 평화협정.. 더보기 크리스마스 캐럴 작품 속 찰스 디킨스의 메세지는? 크리스마스 캐럴은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소설로 그의 대표작으로는 크리스마스 캐럴 위대한 유산 올리버 트위스트 등이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스크루지이다. 줄거리 굉장한 구두쇠인 스크루지 영감이 크리스마스 이브날 꿈을 꿨다. 꿈에서 세 유령은 스크루지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보고 난 스크루지가 악몽에서 깨어나 개과천선하는 내용이다. 과거 유령 스크루지를 찾아온 과거의 유령을 통해 가난에 고통받던 젊은 날의 스크루지를 만나게 된다. 과거의 유령이 보여준 장면은 사랑하는 연인이 떠나고 돈벌이에 집착하는 스크루지 모습이다. 그때부터 피도 눈물도 없는 스크루지의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 현재 유령 현재의 유령이 보여준 장면은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 더보기 미켈란젤로 피에타 조각상, 다비드상 이야기 르네상스 미술을 이끈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라는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는 완전히 상반된 인물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유하지 않은 성격에 주변 사람들과 다툼이 잦았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미켈란젤로가 태어난 곳은 이탈리아의 카프레세라는 작은 마을인데 미켈란젤로가 유명해지면서 마을 이름을 로 변경했다. 미켈란젤로의 어린 시절 어릴때 부터 미술 공부의 기회가 있었던 미켈란젤로였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일찍 알아보고 미켈란젤로는 13살의 나이에 피렌체 공방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약 1년을 보낸 후 미켈란젤로의 인생을 뒤바꾼 로렌초 데 메디치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로렌초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 예술가를 후원하고 있었다. 이때 로렌초의 눈에 띈것이 미켈란젤로였고 메디치 가문의 소장품들을 보며.. 더보기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무엇이 특별한가? 로마로 향했던 미켈란젤로는 당시 율리오 2세 교황으로 부터 시스티나 성당의 대형 천장화 작업을 의뢰받게 된다. 천정화는 어려운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었고 미켈란젤로는 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 거절을 했다. 그러나 교황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국 작업을 승낙했다. 미켈란젤로의 작업은 더디었고 또한 작업한 내용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이에 교황은 불만이 쌓여갔고 미켈란젤로 역시 교황의 입금이 늦어지는 것에 화가 나있었고 두 사람의 불만은 커져갔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갈등 속에서도 자신의 그림을 게을리 하지 않고 결국 4년만에 천장화를 완성한다. 천지창조 무려 아파트 4층 높이의 천장화로 벽화 중앙에는 창세기를 담은 9개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을 발판을 짚고 올라서서 고개만 뒤로 젓혀서.. 더보기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