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영릉 (세종대왕 왕릉) 이 옮겨진 이유는? [역사저널 391회 ] 능은 죽은 왕, 왕비등 죽은 자들을 위한 공간이지만 능을 조성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능 위치, 조성방식은 후대인의 정치적 입장이 반영된 경우가 많다. 왕릉은 죽은 사람의 공간이기 보다는 산 사람들의 정치 공간이라고 볼수 있다. 재위 2년만에 문종이 서거하면서 단종이 즉위하게 된다. 충신들에게 힘있는 수양대군은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이자 멀리해야 하는 존재였다 .이에 수양대군은 살아남기 위해 김종서에게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1453년 단종 1년 발톱을 드러낸 수양대군이었다. 무력으로 조카인 단종을 밀어내고 왕의 자리에 오른것이다. 그러나 야심의 대가인지 세조의 뒤를 이를 맏아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난다. 세조는 이 비극을 아버지 세종의 능을 옮기는 것으로 비극에서 벗어나.. 더보기 장릉 (단종의 묘) 이야기 조선왕릉 중 도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왕릉은 강원도 영월의 단종 장릉이다. 당시 단종의 시신을 누구도 수습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영월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 세조가 왕권을 찬탈한 후 단종이 상황으로 물러나게 되니 단종복위운동이 1456년 일어나고 이것을 세조가 알게 되면서 거사는 실패로 돌아간다. 이때 세조는 사육신의 멸문지화를 명령하게 되고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가족) 의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바다에 버렸다. 무덤을 만들때 가장 금기하는 것이 물이 흐르는 곳이다. 이것은 세조의 분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마저도 모반에 가담 사약을 내렸다. 단종 사후 240년후 단종의 능에 큰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 현.. 더보기 중국과 대만(타이완) 양국이 아닌 양안 관계인 이유 배경 적대적 관계의 쌍방이 극적으로 화해하거나 급격한 정책 전환을 뜻하는 관용어가 있는데 미국 닉슨 대통령은 뼈 속까지 반공주의자였다. 그런 사람이 중국을 방문했던 사건은 쇼크에 가까웠고 닉슨 인 차이나라는 오페라까지 만들어졌다. 미국이 대만과 수교 단절하기 전 상황 1972년 닉슨 대통령 방중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던 해는 1972년이다. 이때 우리나라는 박정희 정부의 유신 선포가 있었다. 닉슨의 중국 방문이후 한국을 달래기 위해 닉스 정부는 미국 특사를 보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이 아시아의 공산화를 방치한다는 의심을 하게 되고 이에 자신이 대처해야 한다는 혼란한 국제정세 속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유신을 선포한다. 10월 유신 특별 선언문 초고에는 닉슨 방중으로 이런 조치를 한다는 문구가 있었을 .. 더보기 숭례문 방화사건 범인 누구? 범행이유 현재 남대문 시장 앞에 있는 숭례문은 원형의 것이 아니다. 2008년 2월 화재로 전소되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예를 숭상한다는 뜻의 숭례문은 조선의 수도 한양도성의 정문으로 600년 동안 굳건히 그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한순간에 우리의 국보 1호는 화재로 사라져 버렸다. 숭례문 방화이유실시간으로 중계된 화재 현장에 온 국민이 충격에 빠졌다. 안타깝게도 숭례문은 석축만 남기고 모두 전소되었다.그러나 더 욱 충격적인 것은 이것은 단순 사고가 아닌 고의에 의한 방화였다. 방화범은 70대 남성으로 철학관을 운영하다 택지개발에 자신의 토지보상그이 적다는 이유로 불만을 품고 방화를 저질렀던 것이다. 방화범은 생수병 3통에 니스를 담아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2008년 2월 10일.. 더보기 다이애나 비, 영국이 그녀를 사랑했던 이유있다. 1981년 7월 영국 세인트폴 성당에서 열린 영국 왕실의 결혼식이 전 세계 50여 개국에 생중계되는 그야말로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이날의 주인공은 영국 왕실의 서열 2 위 찰스 윈저 왕세자와 13살 차이 나는 이제 막 20 살이 된 유치원 보조교사 출신의 다이애나 스펜서였다. 이날의 결혼식은 슬픈 동화의 시작이었다. 다이애나 비는 누구인가? 우리가 알기로는 다이애나는 유치원 보조 교사로 일했다고 알고 있으나 실제로 다이애나 집안은 귀족 가문 출신이다. 다이애나의 성이 스펜서인데 Spencer 가문은 중세까지 올라가서 유서 깊은 가문이다. 영국 내전때 목숨을 잃었던 스튜어트 왕가였고 유명한 사람으로는 윈스턴 처칠의 조상과도 관련이 있다. 다이애나의 어린시절때는 왕실 땅과 인접해 있었던 스펜서 가문의 영지였.. 더보기 이완용 어떻게 친미파 -> 매국노 친일파가 되었나? 덕수궁의 일부였던 중명전(밝은 빛이 이어진다는 뜻)은 황실 도서관이었다. 광명이 계속 비추어야 할 이곳에서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1905년 11월 17일 저녁 일본헌병이 덕수궁 중명전에 들이닥친다. 퇴궐준비를 하던 대한제국의 대신들은 겁에 질려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일본 헌병은 대신들을 회의실에 밀어놓고 감금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포기하는 조약에 찬성하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중명전은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간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이다. 이때 을사늑약에 적극 찬성했던 단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완용이다. 이완용 일본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완용은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였다. 그는 처음에 일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었다. 이완용 어떻게 친미.. 더보기 미켈란젤로 피에타 조각상, 다비드상 이야기 르네상스 미술을 이끈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라는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는 완전히 상반된 인물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유하지 않은 성격에 주변 사람들과 다툼이 잦았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미켈란젤로가 태어난 곳은 이탈리아의 카프레세라는 작은 마을인데 미켈란젤로가 유명해지면서 마을 이름을 로 변경했다. 미켈란젤로의 어린 시절 어릴때 부터 미술 공부의 기회가 있었던 미켈란젤로였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일찍 알아보고 미켈란젤로는 13살의 나이에 피렌체 공방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약 1년을 보낸 후 미켈란젤로의 인생을 뒤바꾼 로렌초 데 메디치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로렌초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 예술가를 후원하고 있었다. 이때 로렌초의 눈에 띈것이 미켈란젤로였고 메디치 가문의 소장품들을 보며.. 더보기 레오나르도 VS 미켈란젤로 (앙기아리 전투 : 카시나 전투) 레오나르도 VS 미켈란젤로 1503년 정부는 피렌체에 있는 레오나르도에게 앙기아리 전투 벽화를 의뢰하게 된다. 그런데 다비스상이 이듬해에 완성이 되면서 미켈란젤로에게 레오나르도가 그리는 벽화 그림 맞은편에 벽화그림을 의뢰한 것이다. 이렇게 세기의 대결이 펼쳐진다. 1504년 당시 52세 레오나르도와 29세 미켈란젤로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그림은 1364년 7월 28일 카시나 전투였다. 피사를 상대로 피렌체군이 크게 승리한 전투이다. 미켈란젤로가 임금 차이로 분노했다는 설이 있다. 레오나르도가 벽화를 그리는 대가로 받은 금액은 10,000 플로린이였는데 피렌체 공무원의 100년 치 임금이었다. 반면에 다비드상을 제작했을 당시 미켈란젤로의 임금은 400 플로린이었다. 그래서 벽화 임금이 더.. 더보기 이전 1 ··· 52 53 54 55 56 57 58 ··· 6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