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가 대제로 불리는 이유 표트르가 바다 진출을 위해 주목한 곳 흑해지역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으로 해양 진출에 적격인 곳이었다. 하지만 흑해로 나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인 아조프해 이곳을 지키는 오스만제국과 싸워야했다. 1695년 오스만 제국과 결전을 벌이지만 첫번째 원정에 실패한다. 1696년 두번째 원정을 나서고 결국 아조프 요새를 차지한다. 서양문물 배우러간 표트르 대제 그러나 아직 오스만 제국을 정면으로 공격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1697년 200명이 넘는 사절단을 꾸려 서유럽으로 보낸 후 문물을 배워오게 했다. 표트르 대제는 근위대 장교로 신분을 속이고 사절단에 합류한다. 표트르 대제가 이렇게 한 이유는 기술 원조와 더불어 전쟁에서의 승리를 홍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서유럽의 발전한 기술을 배.. 더보기 어사 박문수 업적 (나주 괘서 사건) 23회 암행어사의 대명사 어사 박문수가 있다. 박문수는 조선의 대표 암행어사로 기억되고 있으나 그는 사실 한번도 암행어사였던 적이없다. 지방을 감찰하는 어사를 맡았던 적은 있다. 그는 숨어다니는 암행은 하지 않되 지방을 감찰했던 어사였다. 어사를 하면서 백성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해서 백성들에게 정의의 상징 암행어사로 불리게 되었다. 어사 박문수 성격그러나 조정에서 박문수는 이단아에 미치광이로 취급되었다. 박문수는 왜 조정의 이단아가 되었나? 영남지방에서 돌아온 박문수는 왕에게 직접 전복을 내보이며 영남군수의 비리를 고할만큼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건장한 풍채와 함께 거침없는 언행도 불사했던 인물이었다. 냉정하고 예민하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영조였지만 서슴없이 직언하는 박문수를 아꼈다. 영조가 박문.. 더보기 조선어학회 우리말 사전 역사 (말모이/조선어학회 사건) (24-2) 광화문에 가면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 동상 옆에 한글을 지키신 분들을 위한 기념탑이 있다. 조선어학회 탑이다. 말모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만든 주시경 선생은 한가지 소원이 있었다. 우리말 사전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주시경 선생은 우리말이 사라질수 있는 위기감을 느꼈고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말과 글로 쓰인 사전이 필요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전 편찬은 민족 정체성과 독립을 위한 길이라고 믿었던 주시경 선생이었다. 그렇게 1911년 조선어 사전 편찬을 그의 제자들과 계획한다. 이때 만들려고 했던 사전의 이름이 ‘말모이’였다. 그러나 사전 제작은 4년만에 중단된다. 1914년 주시경이 돌연 사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5년이 흘러갔고 1929년 조선어 사전 편찬 작업이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조선어연.. 더보기 한글 어원 및 한글 이름은 누가, 언제 만들었나? 24-1회 한글 이름 탄생 시기일제식민지 시절 일제는 우리의 말과 글까지 철저히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한글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목숨 걸고 우리말을 지키려했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글을 지켜내는 과정은 힘들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조선말이 금지되어 있었고 우리말을 쓰면 처벌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조선 총독부가 펴낸 국어 교과서 국어독본을 사용하고 있었다. 안에는 모두 일본어로 제작되어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 후 조선의 국어는 일본어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말은 새로운 이름이 필요해졌다. '한글' 이라는 말은 세종대왕때부터 썻을 거라 생각하는데 아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이었고 한글이라는 말은 일제강점기때 생겨난 말이다. 한글 어원 한글이라는 이름을 지은 이는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이었다.. 더보기 히잡혁명 강력한 원리주의 원칙을 강조하는 이슬람 국가 이란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변화의 시작은 오스트리아 빈이다. 2011년 빈에서 이란 관련 보고서가 작성되었는데 이란이 핵개발을 하고 있다는 보고서였다. 미국을 중심으로 서방 국가들은 이란에 핵개발을 포기하라고 경제 제재를 가했던 것이다. 이에 이란의 경제 상황은 위기를 맞게 된다. 이 일로 이란 국민 10명 중 1명은 의식주를 해결할수 없는 절대 빈곤 상태가 되어 버렸다. 히잡 혁명 이전 상황 이란 혁명의 주역인 호메이니 증손녀의 사진 한장이 이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바로 증손녀가 들고 있던 명품백때문이었다. 논란이 되자 진품이 아니라고 변명을 했다. 또한 고위직에 있던 아버지를 둔 인물이 반려동물로 맹수를 키우는 사진을 올리면서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더보기 조선 최초 전차 개통 이유 1899년 5월 조선 최초로 전차가 개통이 된다. 전차를 개통한 이유가 청량리 홍릉 때문이었다. 고종이 능행을 많이 다니기 때문에 잦은 능행으로 비용 절감을 위해 건의된 전차가 개통이 된 것이다. 그래서 첫 노선 운행로는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 홍릉까지 연결되도록 많들어졌다. 그런데 정작 고종은 전차를 이용하지 않았다. 전차를 보니 상여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이용을 꺼려했다는 설이 있다. 더보기 명성황후 장례식 (유해 수습은 누가? 장례식에서 무슨일이? ) 1895년 10월 8일 조선의 국모였던 명성황후는 일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다. [이전글]을미사변 명성황후 장례 전 명성황후 남은 유해는 어떻게 했을까? 당시 조선군 훈련대 참위였던 윤석우가 불에 탄 시신을 목격했으나 누구의 시신인지 알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이에 조선군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이 타고 남은 시신을 연못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윤석우는 왕비의 시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몰래 시신을 수습한다. 온전치 못한 하반신만 겨우 수습한 후 오운각 서쪽 산 아래에 매장했다가 명성황후 사망 발표 후 겨우 빈전( 관을 모시는 전각)으로 모셔진 유해이다. 명성황후 유해 수습에 대한 기록은 매천야록( 선비 황현이 기록한 조선 말기 비사)에 조금 남아있다. 유골과 재가 섞여 있었고 장례에 익숙한 환관을 불러.. 더보기 창덕궁을 만든 이유는?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다. 그래서 왕이 가장 오래 머물러 있는 궁을 생각하면 경복궁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으나 실제로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이다. 궁궐의 역사를 보면 경복궁은 약 225 년이고, 창덕궁은 약 500년 이고 창경궁은 약 420년 정도이다. 조선 전기에도 경복궁이 있었으나 왕이 다른 궁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조선 전기에도 양궐 체제로 법궁과 이궁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었다.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이용했던 이유 1394년 태조 이성계는 한양 천도후 경복궁을 조성했다. 조선의 3대 왕 태종 5년 창덕궁 창건을 명했다. 조선 후기 왕들도 임진왜란 이후 소실된 경복궁을 재건하지 않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원하고 경희궁을 신축했다. 그 이유는 2대 왕 정종이 t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천도했다... 더보기 이전 1 ··· 50 51 52 53 54 55 56 ··· 6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