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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한국전쟁 중 영국군 참전 배경 및 규모, 주요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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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였다. 영국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낙동강 방어선, 인천상륙작전, 서울 수복 작전, 설마리 전투(임진강 전투), 금성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가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군 참전 규모와 배치

영국군은 한국전쟁에서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였다.

  • 총 파병 규모: 약 56,000명
  • 지상군: 제27여단(1950년), 제29여단(1951년) 및 이후 영연방 사단(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연합) 편성
  • 해군: 항공모함, 순양함, 구축함 등 총 17척의 함선 배치
  • 공군: 제77전투비행대대가 호주군과 함께 작전 수행

영국군은 초기에는 소규모 병력으로 참전했으나, 전황이 악화되면서 대규모로 병력을 추가 파병했다. 특히 1951년부터는 영연방 사단(British Commonwealth Division)이 구성되어 주요 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1️⃣ 영국군의 참전 배경

영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가장 큰 이유는 냉전 시기 서방 진영의 결속과 미국과의 동맹 관계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미국과 함께 소련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협력하고 있었으며,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하자 미국이 즉각 개입을 결정했다. 영국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신속히 참전을 결정했고, 1950년 7월 7일 유엔군 사령부가 창설되면서 영국군의 본격적인 파병이 이루어졌다.

 

영국은 한국전쟁 개전 직후인 1950년 7월, 극동 지역에 배치된 해군 함정을 우선 파견하였으며, 8월부터는 지상군 파병을 결정하고 병력을 증원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군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라 군비 감축이 진행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냉전에서 미국과의 협력을 유지하고 공산주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참전을 결심한 것이다

 

① 영국 정부의 신속한 결정

  •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 28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침략을 규탄하고 유엔군 파병을 결정했다.
  •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이었지만, 영국은 유엔군 내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병력을 파병하며 미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 이는 냉전 시대의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고,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② 영국군의 첫 파병 (1950년 7월)

  • 1950년 7월 29일, 영국은 극동 지역에 주둔 중이던 **26보병여단(26th Infantry Brigade)**을 한국에 급파했다.
  • 이 부대는 일본에서 주둔 중이었기 때문에 신속히 투입될 수 있었으며, 미국 8군과 함께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투입되었다.

 

2️⃣ 한국전쟁에서 영국군의 주요 전투

 ① 낙동강 방어선 전투 (1950년 8~9월)

  • 영국군 27여단(27th Infantry Brigade)은 미군과 한국군과 함께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했다.
  • 당시 북한군은 기갑부대를 앞세워 낙동강을 돌파하려 했지만,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의해 막혔다.
  • 영국군은 대대적인 포격과 방어전을 수행하며 북한군의 공격을 지연시키는 데 기여했다.

 ② 인천상륙작전 및 서울 수복 (1950년 9월)

  • 영국 해군은 1950년 9월 15일 진행된 인천상륙작전에서 해상 지원을 담당했다. 영국의 항공모함 트라이엄프(HMS Triumph)는 함재기를 이용해 북한군 진지를 폭격했고, 영국 구축함들은 상륙군을 엄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 이후 유엔군의 북진 과정에서도 영국군은 평양 점령 작전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중국군의 개입으로 인해 전황이 급변하면서 영국군도 후퇴해야 했다.

💥 ③ 설마리 전투 (1951년 4월 22일~25일)

  • 중공군은 1951년 4월 **제5차 공세(춘계 공세)**를 개시하며 다시 서울을 노렸다.
  • 이때 영국군 29보병여단(29th Infantry Brigade)이 임진강 방어선을 맡았고, 그중 글로스터셔 연대가 설마리 전투에서 영웅적인 저항을 펼쳤다.
  • 중공군 4만 2천 명 vs 영국군 650명
  •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영국군은 포위되어 대부분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지만, 이들의 저항 덕분에 유엔군이 서울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었다.
  • 이 전투로 인해 글로스터셔 연대는 "Glorious Glosters(영광의 글로스터셔 연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④ 금성 전투 (1953년 7월)

  • 1953년 7월 13일~27일, 금성 전투에서 영국군은 한국군과 함께 마지막 대규모 전투를 치렀다.
  • 중공군은 휴전 협정이 체결되기 전 마지막 공세를 감행했으나,
  • 유엔군은 이를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결국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3️⃣ 영국군의 피해 규모 및 전쟁 이후

📌 영국군의 총 피해 규모

  • 전사: 1,109명
  • 부상: 2,674명
  • 포로: 1,000여 명

📢 영국군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으며, 가장 치열한 전투에서 희생을 감수하며 싸웠다.

 

📌 한국과 영국의 유대 관계 강화

  • 영국군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한반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유지했다.
  • 현재 한국에는 파주 설마리 영국군 전적비와 추모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 1999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방문하여 헌화하며 영국군의 희생을 기렸다.

✍️ 결론: 한국전쟁에서 영국군의 역할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한 유엔군 핵심 전력
낙동강 방어선, 인천상륙작전, 서울 수복, 설마리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

한국전쟁에서 영국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6만여 명의 병력을 파병했으며, 1,078명이 전사했다. 특히 임진강 전투, 가평 전투, 철원 훅 고지 전투등 영국군의 용맹함과 희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전투였다.

 

\오늘날 영국과 한국은 매년 이 전투들을 기리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부산 유엔기념공원서울 전쟁기념관에서도 영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의 희생을 기념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영국군의 희생은 단순한 군사적 기여를 넘어,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국제적 협력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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