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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창경궁 경춘전 환경전 /창경원이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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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과 창경궁은 숲에 둘러싸여 있다. 숲에 가려져 있어 주거 환경에 적합했다. 창경궁은 성종의 할머니 정희왕후와 어머니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 궁으로 여인들이 살기 좋게 만든 공간이다. 여인들이 있으니 왕은 따라가기 마련이다.  

 

경춘전과 환경전

 

창경궁 경춘전

창경궁 경춘전은 궁중 암투의 주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 첫번째 주인은 성종의 친어머니 소혜왕후였다. 소혜왕후는 인수대비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인수대비가 승하한 건물이 경춘전이다. 그 이후에 약 200년 후 숙종의 비 인현왕후가 기거했다가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약 70년 후 혜경궁 홍씨의 거처로 사용되며  정조가 태어난 곳 또한 경춘전이다.

 

창경궁 경춘전

이때 사도세자가 용꿈을 꾸었다고 그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 가족에게 그려주는 장면이 영화 사도에 나온다. 장인이 이 그림으로 부채를 만들어줬는데 뒤주에서 죽어갈때 이 그림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정조도 이 건물은 아버지 사도세자와의 사연이 있는 곳이라 애착이 많았었다. 정조 즉위 후 어머니를 위해 창경궁에 자경전을 지었다. 자경전 맞은 편에는 경모궁(사도세자 사당)이 위치해 있다. 그렇게라도 부모님이 함께 하길 바랐던 정조였다. 

 

연도순 정리 

경춘전은 주로 대비나 왕비, 왕세자빈 등 왕실 여성들의 침전으로 사용되었으며, 두 명의 조선 왕(정조, 헌종)이 이곳에서 태어난 역사적인 장소이다. 또한 인현왕후와 혜경궁 홍씨 등 여러 왕실 여인들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곳이다. 이곳에 살았던 주요 인물들을 연도와 함께 다시 정리해 보겠다.

  • 15세기 후반 (성종 대): 창경궁이 성종 때 대비들의 거처를 위해 확장되면서 **소혜왕후 (인수대비)**가 경춘전에 거주하였다. 그녀는 성종의 어머니였다.
  • 17세기 후반 ~ 18세기 초: 인현왕후 (1667~1701), 숙종의 계비였던 인현왕후도 경춘전에 거처하며 생을 마감하였다.
  • 18세기 중반: 혜경궁 홍씨 (1735~1815),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도 경춘전에 거주하였다.
    • 1752년: 혜경궁 홍씨가 이곳에서 아들 정조를 낳았다. 정조는 자신이 태어난 곳임을 기념하여 '탄생전'이라는 현판을 직접 써서 걸기도 하였다.
  • 19세기 초: 신정왕후 조씨 (1808~1890), 순조의 아들이자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가 이곳에서 헌종을 낳았다.
    • 1827년: 신정왕후 조씨가 이곳에서 헌종을 낳았다.

경춘전은 주로 대비나 왕비, 왕세자빈 등 왕실 여성들의 침전으로 사용되었으며, 두 명의 조선 왕(정조, 헌종)이 이곳에서 태어난 역사적인 장소이다. 또한 인현왕후와 혜경궁 홍씨 등 여러 왕실 여인들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곳이다.

 

환경전 

환경전은 기쁘고 경사스러운 곳이라는 뜻. 중종 임금이 돌아가신 곳이 바로 환경전이다. 이때 중종을 치료했던 의녀가 대장금이다. 대장금은 조선시대 최초이자 유일한 왕의 여성 주치의였다.  조선 후기에서 소현세자가 돌아가신 곳도 이곳이다. 환경전은 19세기에 왕실의 주요 어른들이 돌아가셨을때 빈소가 마련된 빈전으로도 여러차례 사용되었다. 임오군란 당시 성난 군인을 피해 지방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의 가짜 빈전을 차리기도 했던 곳이다. 

 

환경전 기쁘고 경사스러운 곳

 

 

창경궁 환경전 : 소현세자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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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 창경원으로

자경전 터 

자경전은 고종 10년에 화재로 불타버리고 1911년 자경전 터에 일본식 건물 장서각 도서관 겸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장서각이 세워지기 전부터 창경궁은 창경궁이 아니였다. 창경궁의 정전 명정전은 모란나무를 심은 박물관으로 보루각을 중심으로 궐내각사를 헐고 반달골 2마리, 호랑이 1마리등 72종 361마리를 들여놓고 동물원을 만들었다. 1920년 서울인구의 1/10에 달하는 2만 8천명의 사람들이 4월에 창경원을 방문했고 창경원은 해방 후까지 운영되다가 1983년에 12월 31일까지 유지되었다. 

 

 

1911년 자경전 터에 일본식 건물 장서각 도서관 겸 박물관
1911년 자경전 터에 일본식 건물 장서각 도서관 겸 박물관
일제시대 창경궁 춘당지 모습
일제시대 창경궁 춘당지 모습
유원지가 된 창경궁
유원지가 된 창경궁

 

1922년 일제는 수천 그루의 벚나무 숲을 창경궁에 조성했다. 1986년 다시 창경궁을 복원하면서 동.식물원을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졌고 창경원에 많이 있었던 벗나무는 윤중로로 옮겨 심어 놓았다. 매년 4월에 윤중로에 벛꽃 축제를 하고 있다.

 

여의도 윤중로

 

 

여의도 벚꽃 축제 ( 여의도 벚꽃 어디서 왔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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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든 이유는 ? 

일제는 고종을 강제 폐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을 위로하겠다며 순종에 대한 배려로 창덕궁에서 거주하던 순종이 지루할까봐 유원지를 만들어 줬다는 것이다. 이에 순종은 자신이 혼자즐기는 것이 아닌 국민들에게 개방하겠다고 했다. 이에 일제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일제강점기 창경원 동물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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