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서 "책을 태우고 사람을 죽인다"는 일은 종종 강력한 권력을 가진 통치자들이 사상과 생각을 통제하려고 할 때 일어난다. 분서갱유는 그 대표적인 예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 시행한 강력한 억압 정책이다. 하지만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순히 책 몇 권을 태운 일이 아니라 진시황이 왜 유학(유교) 사상을 그렇게 적대시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법가 VS 유가
유가는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 공자(기원전 551~479)가 창시한 사상이다. 공자는 혼란스러운 춘추시대에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아가고, 나라의 지도자도 도덕적으로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가의 핵심 가치는 인(仁), 의(義), 그리고 **예(禮)**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 "군주는 인자하게 백성을 돌보고, 백성은 군주를 믿고 따르라."
- "도덕 없는 지도자는 지도자가 아니다."
이 말이 진시황에게는 반갑지 않았다. 진시황은 나라를 하나로 통일한 뒤, 중앙 집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을 "천하의 주인"으로 여겼기 때문에, 유가가 말하는 "군주의 도덕적 책임"이라는 개념이 거슬렸다. 진시황은 **법가(法家)**라는 사상을 따랐는데, 법가는 "법으로 다스리는 것이지, 도덕이나 감정으로 나라를 통치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법가의 사상은 유가와 정반대였다. 유가 학자들은 진시황의 강압적인 통치 방식에 반대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목소리를 냈다. 이 때문에 진시황은 유가를 "권력을 방해하는 사상"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분서(책을 태우다): 유가의 책을 왜 없앴을까?
진시황은 기원전 213년에 **"모든 책을 모아 태워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기에는 《시경》, 《서경》 같은 유교 경전과 제후국들의 역사 기록들이 포함되었다.
왜 이런 극단적인 명령을 내렸을까?
- 사상을 통일하기 위해서: 진시황은 천하를 하나로 통일했지만,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른 생각과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보기엔 사람들이 유가 책을 읽으면, 중앙정부의 법과 명령을 따르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 반발을 막기 위해서: 유가 학자들은 "진시황은 도덕적으로 부족하다"고 비판하거나, 과거의 제후국 시절이 더 좋았다고 주장했다. 진시황은 이를 반역으로 간주했다.
- 실용성을 중시해서: 진시황은 농업, 의학, 천문학 같은 실용적인 책들만 남기고, 유가처럼 "도덕과 철학에 관한 책"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책을 태운 것은 아니었다. 진시황의 도서관인 아방궁에는 중요한 자료들이 비밀리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후대에 일부 유교 경전이 다시 등장할 수 있었다.
갱유(유학자를 생매장하다): 왜 사람까지 죽였을까?
책만 태운 것이 끝이 아니었다. 기원전 212년, 진시황은 유가 학자 약 460명을 처형했다. 이들은 주로 황제를 비판하거나, 과거의 제후국 시절을 이상적으로 이야기한 사람들이었다. 진시황은 이들을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자들"로 간주하고, 잔인하게 생매장했다.
갱유 사건은 단순히 사상의 억압이 아니라, 진시황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학자들 사이에서 진시황에 대한 반감이 크게 커졌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훗날 분서갱유와 흡사한 일은 단행했던 인물이 있었고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중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엇일까? 맞춰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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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갱유의 결과: 유가가 정말 사라졌을까?
진시황이 그렇게 억압했는데도, 유가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진나라가 멸망한 뒤, 유가는 더욱 강하게 부활했다. 한나라(기원전 202~서기 220)의 한 무제는 유교를 나라의 중심 사상으로 채택했다. 이때부터 유교는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전체에서 중요한 사상이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진시황의 분서갱유 덕분(?)에 사람들이 "책과 지식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지식의 가치를 강조한 결과를 낳았다.
▼ 분서 갱유 사건과 만리장성으로 보는 진시황제의 폭정 이야기 자세히 보려면 ▼
서양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로마 제국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는 기독교를 탄압하며 성경을 불태우고, 기독교 신자들을 처형했다. 이와 분서갱유는 사상과 신념을 억압하려 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기독교는 더욱 강하게 퍼져나갔다.
진시황은 자신이 "천하의 주인"이라고 여겼지만, 그의 방식은 나라를 길게 유지하지 못했다. 유가는 천년 이상 살아남았고, 오늘날에도 그 가르침은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결국, 도덕과 자유는 억압할 수 없다는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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