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orld History/벌거벗은 세계사

미.영 전쟁 (Anglo-American War) 원인 결과 (백악관이 불탄 날) 205-4

반응형

수도 워싱턴이 불타오르고, 백악관이 잿더미로 변했으며, 적국의 깃발이 당당히 휘날리는 광경을 상상해 보자. 이 충격적인 상황은 소설이 아니라 실제로 1812년 전쟁에서 미국이 마주했던 참혹한 현실이다. 독립 이후 미국은 어떻게 옛 식민 지배자였던 영국에게 민주주의의 심장부를 불태우는 수모를 겪게 되었을까? 미·영 전쟁의 이야기는 자존심, 권력, 민족주의가 뒤엉킨 드라마로, 미국의 정체성을 영원히 바꾼 역사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이전글보기]

 

 

캐나다는 왜 영국 국왕을 섬기는가? 205 -2

🧣 캐나다 뜻, 캐나다 퀘벡이 프랑스어 쓰는 이유 [이전글 먼지보기] 캐나다 역사 : 캐나다 뜻 , 캐나다 퀘벡이 프랑스어를 쓰는 이유 205-1캐나다는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로 러시아 다음

jangane.tistory.com

 

미·영 전쟁(1812년 6월 18일-1815년 2월 17일)은 미국과 영국 사이에 벌어진 두 번째 주요 전쟁으로, 미국 독립전쟁(1775-1783년) 이후 미해결 문제들로 인해 발생했다. 주요 원인은 영국이 미국 무역을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미국 선원을 강제 징집한 문제와 캐나다에 대한 미국의 영토 확장 야망 때문이었다.

🔹 배경과 원인

당시 유럽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간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 1803~1815년)이 치열했다. 1806년 나폴레옹은 영국에 타격을 주기위해 대륙 봉쇄령을 발표한다. 이에 영국도 맞서서 프랑스가 장악한 유럽 해안을 봉쇄하는 ‘해상봉쇄령(Orders in Council)’을 발동했고, 프랑스와 교역하는 모든 선박을 강제로 검열하고 물건을 발견하면 몰수하거나 높은 세금을 매기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이는 중립국 미국에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혔다.

 

여기에 미국 선원 수천 명이 강제로 영국 해군에 징집되는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미국 국민의 분노를 키웠다. 원래 영국에 '프레스 갱'이라는 강제 징집대가 있었다. 영국배에 올라타 처음에는 해군복무에 대한 지원자를 받고 부족할 경우 그 배의 선원을 강제로 징집하는 관행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 중에 다른 나라인 미국 선원까지 잡아갔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에 1812년 미국이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토 확장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미 의회에서는 캐나다 점령(당시 영국령)과 원주민 저항 세력 제거를 주장하는 전쟁 강경파(War Hawks)가 등장했다. 특히, 쇼니족(Shawnee)의 지도자 테쿰세(Tecumseh)가 영국의 지원을 받아 원주민 동맹을 형성하자 이를 위협적으로 여긴 미국은 영국과의 전쟁을 선택했다.

 

🔹 주요 전투와 사건들

  • 초기 디트로이트 전투 (1812~1813년): 미국의 캐나다 침공은 연이은 실패로 끝났다. 특히 1812년 디트로이트와 퀸스턴 하이츠(Queenston Heights)에서 영국·캐나다군과 원주민 동맹군이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눈속임으로 미군을 이겼다. 

 

디트로이트 전투는 미국 전쟁사에서 손꼽히는 굴욕전투이다.

 

  • 워싱턴 D.C. 방화 사건 (1814년 8월 24일): 영국의 베테랑 군사 만 오천 명을 실은 함대가 미 해안에 도착, 그 중에 2500명을 실은 함대는 수도 워싱턴 D.C.를 점령해 닥치는 대로 건물을 파괴하고 주요 건물인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을 불태웠다.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대통령이 급히 피신했고, 영부인 돌리 매디슨(Dolley Madison)이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를 챙겨 탈출한 일화가 유명하다. 이 사건은 미국의 수도가 침공당한 최초이자 마지막 사례로 남아 있다. 
 

미국 백악관이 하얀색인 이유 : 숨겨진 전쟁의 흔적

오늘날 미국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White House)은 미국 권력과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이름은 처음부터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 비극과 실용성, 대중적 사용

issueri.tistory.com

 

  • 볼티모어 전투(포트 맥헨리, 1814년 9월 13~14일): 미군은 볼티모어를 지켜냈다. 이 전투를 목격한 프랜시스 스콧 키(Francis Scott Key)는 미국 국가가 된 『성조기(The Star-Spangled Banner)』를 작사했다.
  • 뉴올리언스 전투 (1815년 1월 8일): 앤드루 잭슨이 이끈 미군은 영국군에 결정적으로 승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투는 이미 평화 조약 체결(헨트 조약, Treaty of Ghent, 1814년 12월 24일) 이후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 벌어진 사건이다.

🔹 헨트 조약(1814년 12월 24일)

이 전쟁은 미국, 영국 서로에게 타격을 주는 지지부진한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양쪽 다 큰 이득 없이 마무리된 전쟁이 되었다. 벨기에 헨트에서 협상 끝에 맺은 조약은 전쟁 이전 상태(status quo ante bellum)를 유지하는 내용으로,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었던 해상 문제나 강제 징집에 대한 해결책은 없었다.

 

 

🔹 역사적 의의와 유산

양측 모두 영토적 이익은 없었지만,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민족주의(nationalism)가 급부상했고,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선이 정리가 되었다. 원주민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미국과 영국 관계는 호전되었고, 훗날 동맹관계로 발전했다.

 

 

 

흥미로운 이야기
미국에선 가장 유명한 전투인 뉴올리언스 전투가 실제론 이미 전쟁 종료 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느린 통신 속도가 만든 역사적 해프닝으로 남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