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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덕수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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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은 조선왕조 500년 중 가장 마지막 비운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덕수궁은 선조(14대) 가 임진왜란때 의주로 몽진한 후 1년 후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모든 궁궐이 불타버려 머무를 곳이 없어지자 성종(9대 1469년 ~ 1494년)의 형 월산대군이 살던 집에서 지내게 된다. 이곳에 월산대군의 증손자가 살던 석어당을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 

 

덕수궁

💡정동 역사 : 월산대군 집 -> 경운궁이 되기까지 역사보기 

석어당

 

 

덕수궁 석어당이 특별한 이유

덕수궁 석어당, 조선 왕실의 비운이 깃든 공간👉 오늘날 서울 한복판에 있는 덕수궁. 그 안에 비교적 소박한 건물 하나가 조용히 서 있다. 바로 **석어당(昔御堂)**이다.궁궐치곤 단청도 없고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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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

 

 

덕수궁 돌담길 커플이 같이 걸으면 헤어진다 ! 왜?

노랗게 물든 은행잎 사이로 손을 꼭 잡고 걷는 연인들.서울에서 가장 낭만적인 산책로로 꼽히는 덕수궁 돌담길은,아이러니하게도 오래전부터 ‘커플이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로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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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은 26대 고종때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한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 된 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하게 되고 황후가 살해당한 경복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고종은 1년 후 경운궁으로 들어간다. 

 

경운궁 일대에는 미국,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서양의 공사관이 있어서 일본의 위협으로 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사관의 영역을 피해서 궁궐을 짓다보니 다른 궁궐에 비해 궁궐의 영역이 들쑥날쑥이다.  경운궁(덕수궁)으로 들어간 고종은 자주 국가 대한제국 설립을 추진한다. 1897년 10월 12일 황제에 즉위한다. 국호는 대한이었다. 

 

고종이 폐위된 직후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 1907년 보위를 넘겨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경운궁에 남겨진 아버지에게 장수하라는 뜻에서 덕수라는 명칭을 올린 것이다. 물러난 고종이 1919년 사망할때 까지 덕수궁에서 살았다. 고종 사후 덕수궁은 일제에 의해 빠르게 훼손되어 갔다. 

 

덕수궁 대한문 정문

 

동문인 대한문은 원래는 정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한문 앞 도로가 도성의 중심지가 되면서 정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중화전 

금천교를 지나 나오는 곳이 중화문과 중화전이다. 1902년 고종이 경운궁을 환궁한지 5년이 지난 시점이다. 중화전으로 들어가는 답도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 두마리가 새겨져 있다. 중화전은 외국 사신 접객 ,국가 행사를 치르던 곳인데 원래는 2층으로 지었으나 중화전 중건이후 2년만에 불이나 다시 2년 뒤에 규모를 축소하여 지은것이 지금의 단층 중화전이다. 

 

목각으로 만든 용 두 마리

 

광명문을 지나 행각사이 다른문으로 들어가면 황제의 침전 함령전이 있다. 사신을 접대했다는 기록이 발견되면서 편전 기능도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 1904년에 큰 불이 났는데 그 화재가 시작된 곳이 함녕전 온돌이었다.  이곳은 고종이 마지막 시간을 보낸 곳이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고 1919년 1월 함녕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종이 숨졌을때 사람들 사이에 고종의 독살설이 나돌았다. 공식적인 사인은 뇌일혈이었으나 건강하던 고종이 식혜를 마시고 갑자기 경련을 일으켜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퍼지며 그동안 일제에 대한 분노가 폭발해 3.1 만세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해 4월에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사실 고종은 나라를 지키지 못한 임금으로 지금까지도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망국의 임금이었을 망정 그의 죽움이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됐으니 당시 이 땅의 민초들에게 군주는 여전히 중요한 구심점이었던 셈이다. 

 

함녕전 옆에는 덕홍전이 있는데 시해된 명성황후 장례절차를 준비했을때 빈소로 마련한 장소가 이곳 덕홍전이었다. 고종이 황제에서 물러난 후 외빈을 만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중화전 뒷편으로는 석어당이 위치해 있다. 석어당 옆에 즉조당이 있고 즉조당의 복도를 따라가다보면 준명당이 나오다. 

 

석조전 

 이 서양식 건물은 영국인들의 제안과 설계로 시작되었다. 서양 궁전 형식을 모방해 한 건물 안에 집무실, 침실, 행사장 등 모두 갖추고 있다. 우리의 전통 건물은 모든 공간을 별도로 두는 것과 다른 형식이다. 고종은 근대 황제국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해 석조전 건립을 추진했다.1897년 구상~ 1910년 말에 준공되었다.  그러나 건물이 준공되기 직전 나라를 잃었고 석조전은 한번도 황제의 공간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1907년 순종이 황위를 물려받으며 귀빈을 대접하고 만찬을 배푸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가 1919년 고종 사망후 덕수궁 공원화 사업이 추진되면서 석조전의 용도는 미술관으로 바뀌게 된다. 해방 후 이곳은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두 차례 열리기도 했다. 지금은 대한민국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38년에는 석조전 서편에 석조전 서관이 만들어지면서 이 건물 역시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사용하고 잇다. 

 

일제 강점기 서관 앞마당에는 분수도 건설되어 공원의 

 

 

정관헌 

정관헌은 고종 황제가 자주 커피를 마셨다는 건물로 서양식 기둥을 세운 베란다 구조이다. 전통문양 박쥐가 새겨져 있는데 황실의 복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다.  대한제국 시절 양관이라 불리는 러시아 출신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고종의 개인 카페 용도로 사용되었다. 

 

정관헌 중화전 뒷편에 있음

 

 

▼고종 독살설 

 

고종은 독살 되었다! ? (고종 황제 죽음에 대한 독살 의심 증거들)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6회] 오늘의 탐사지: 덕수궁 주제: 고종 커피 독살 사건 출연자: 설민석, 문가영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었으나 고종 퇴위 이후 순종이 올린 궁호가 덕을 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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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의 서양식 건물 석조전은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하려 지은 건물이었다. 1910년 준공된 건물 석조전은 전통 방식과 달리 편전, 침전과 응접실이 한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고종은 석조전을 활용하지 못한다.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고종이 일본에 의해 폐위되고 경운궁에 있는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며 순종은 경운궁의 이름을 덕수궁이라고 바꿨다. 

 

 

https://youtu.be/izpEB7nTZls?si=6nT48Zb0BL82NoI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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