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기원
지금과는 달리 고려 초기에는 성씨가 있는 사람이 적었다. 과거 고려 초기까지도 성씨를 가지는 건 특권이었다. 박혁거세라는 이름의 박도 후대에 붙여진 성이다. 삼국사기에 박씨 성을 쓴 사람의 기록은 없다. 고구려를 세운사람은 주몽이다. 그러나 고주몽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후대에 고씨 성을 붙였기 때문이다. 신라왕의 성씨 김씨와 석씨 또한 자손들은 이름만 존재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왕부터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성씨를 사용했고 중국과 교류하는 순서대로 고구려-백제-신라 순으로 우리나라도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공자의 성은 공, 이름은 구로 공구이다. 장보고의 경우도 원래 이름은 궁복이다 그래서 당나라에 갔을 때 가장 많은 성씨가 장씨였고 이를 가져온 것이다.
왕건의 사성 정책
우리가 쓰는 성씨가 보편화 된 것은 930년 안동에서 벌어진 고창전투에서 견훤에게 큰 승리를 거둔 왕건이 승리의 공신이었던 안동 세 호족의 공을 치하하고자 성씨를 하사하는 사성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친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사용되는 우리의 성씨가 뿌리내리는 순간이었다.
927년 견훤과의 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갑옷을 바꾸어 입고 대신 전사한 신숭겸도 성씨가 없었다. 원래 이름은 그냥 능산이었는데 왕건이 그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평산 신씨를 주면서 신숭겸이 된것이다. 그래서 신숭겸은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된다.
본관의 기원 (토성분정)
940년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인물들에게 공을 치하해야 했는데 선물을 주면 내 것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왕건은 아무리 줘도 없어지지 않는 기발한 보상 방법으로 각지 호족에게 성씨를 내린 것이다. 왕건이 지방 유력 계층에 성씨와 함께 그들의 거주지를 본관으로 하사한다. 이렇게 나누어 준 성씨를 토성이라고 한다. 토는 지연, 지역이다. 성은 혈연이다. 그래서 토와 성이 결합하여 본관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을 토성분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본관은 대부분 고려초에 시작되는 것이 많다.
토성정책의 이점
이때 왕건은 지방 행정 단위의 이름을 정했다. 주,부,군 현의 이름으로 등급을 정하고 군현 아래 향,소, 부곡, 진,역, 장,처를 두었다. 그래서 살고 있는 지역에 따라 고려 안에서 자신의 등급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연히 거주지 이동을 하려 했기 때문에 고려시대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그래서 자기 거주 지역 본관에 묶여있어야 했던 고려인들이다. 그러나 토성을 받은 세력은 자기 지역에서 자율적으로 통치가 가능했다 .중앙정부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임을 과시할수 있는 도구였던 것이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어 많은 사람들의 불만이 있어도 지배층의 논리로 토성이 정착할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상하, 군신 관계를 명확히 다진 계기가 되었다. 토성을 주고 호족들의 충성을 얻은 왕건이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왕건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백제 사람들에게도 모두 짐승 이름으로 소, 코끼리,, 말, 돼지 , 노루 성씨를 하사했다. 그러나 짐승 성을 받은 목주 사람들은 반대로 백제의 독립투사로 비춰질 수 있다.
천민의 성씨
천민의 성씨로 알려진 천방지축마골피는 근거가 없는 말이다. 역시 왕건이 통성 중 일부로 내린 성씨들이고 조선 후기로 가면 성씨를 선택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이 아마도 다수가 쓰는 가장 평범한 성씨를 골랐을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천방지축마골피는 천민의 성도 아니고 가짜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적은 성들인 진짜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성씨가 적은 이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고려의 지배층이였던 개성 왕씨를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몰살시켰다. 고려시대에 성씨로 권세를 누린 왕씨였으나 목숨을 잃게 되기도 했던 것이다. 조선 왕조는 특이하게 전쟁을 거치지 않고 탄생한 왕조여서 고려 권력층이였던 왕씨의 존재가 많이 신경쓰였을 것이다. 이렇게 성씨는 정치적 명분이 되기도 했듯이 한국의 성씨는 자유롭게 창성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나라 성씨는 적은 수로 유지되어 오고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성씨만 30만개가 넘을 정도로 성씨만으로 구별이 가능한 일본이다. 미국은 이보다 더 많은 100만개 정도의 성씨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성씨 약 5천개도 많아진 것이다 .한국으로 귀하한 사람들이 성을 만들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
족보에 가로선은 한 세대를 의미한다. 그래서 아들에서 아들로 한 페이지에 여러 세대를 함께 기록하는 형식이다. 고려 시대 고창전투 승리 공신인 권행을 시조로 한 안동 권씨 족보가 있는데 중국 명나라 성화 (연호) 연간에 제작되었다고 해서 안동권씨성화보라고 해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족보이다.
이 족보에 9천명의 이름이 올라있으나 모두 안동 권씨는 아니다. 사위의 이름도 등재되어 있다. 그래서 9천명 중 안동 권씨는 약 300명에 불과하고 혼인관계로 엮인 모든 사람을 기록한 것이다.
대한민국에 김씨가 많은 이유
현재 대한민국 전체 성씨는 5582개이다. 이 중에 5명 중 1명은 김씨이고 김, 이,박 최씨는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다. 조선 후기 경제 발달로 인해 평민과 천민의 경제력이 상승하게 된다. 이런 경제적 여유는 신분 상승 욕구를 부추기게 되고 족보를 위조하는 직업까지 성행하면서 족보를 사는 행위가 늘어나고 반면 숙종의 환국정치로 조정이 어지러웠고 양반가운데 몰락하는 양반도 늘어났다. 원칙적으로 3대 이상 벼슬을 못하면 양반 자격이 박탈당하게 되고 이로 인해 신분 상하이동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족보를 사고 파는 행위가 성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단지 만족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양반들은 군역이 면제되었다. 고려시대 양반들은 군역의 의무를 졌지만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양반이 군역을 지지 않게 되면서 그들의 몫까지 백성에게 전가하게 되고 이로 인해 백성들은 불법 족보를 위조하면서 신분 상승의 노력을 하면서 오늘날 모든이가 족보를 가지는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익숙하면서 뼈대가 있는 성씨를 가지려고 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김이박최 성씨중에서 고르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가 되면서 모두가 양반이 된다. 최종적으로 갑오개혁때 노비제도가 폐지되면서 모두가 족보를 가질수 있게 된 것이다. 1920년 일제 강점기에 가장많이 출반된 책이 족보였다.
그래서 집집마다 족보가 있고 우리가 양반의 후손이라는 것은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거짓말이 오랫동안 대한민국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날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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